호(胡)왕조의 과감한 개혁

2021. 7. 12. 01:38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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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왕조 말기의 오랜 혼란은 필연적으로 권문세가에 의한 토지겸병을 불러왔다. 유력자들이 땅을 뺐고 개간해 늘려가면서 많은 백성들은 유랑하거나 농노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세금을 낼 공전(公田)과 병역에 동원할 장정들을 확보하지 못하면 새 왕조의 재정을 충당하고 외적의 침략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호왕조 궁궐 유적의 용 조각상
호왕조 궁궐 유적의 용 조각상

호뀌리는 과감하게 한전법(限田法)을 실시했다. 모든 귀족과 관리 백성들에게 신분에 따라 토지 소유의 한도를 정해 주었다. 그리고 5년마다 자기 땅 위에 이름과 면적을 적은 푯말을 세우도록 하고 푯말이 없는 땅은 모조리 압수해 국유지로 만들었다.

 

쩐씨 왕족을 비롯한 구 지배층의 물적 토대가 한꺼번에 붕괴됐고, 호뀌리 정권에 도전할 신흥세력의 등장도 예방할 수 있었다. 대신 국고에는 엄청난 세수가 쏟아져 들어왔고, 이는 새로운 중앙집권 체제를 세우는 자원으로 사용되었다.

 

동전을 지폐로 바꾸는 화폐개혁도 단행했다. 통보회초(通寶會鈔)라는 베트남 최초의 지폐를 발행한 것이다. 액면에 따라 7가지 종류인 지폐를 발행한 뒤 그때까지 써오던 동전의 사용을 금지했다.

 

백성들은 가지고 있던 동전을 관아에 들고 가서 모두 지폐로 바꿔야 했다. 당시 베트남 상공업이 지폐가 필요할 정도로 발달한 게 아니었는데도 무리한 화폐개혁을 실시한 것은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동전을 녹여 무기로 만들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종이에 각종 동물을 그려 넣은 지폐는 백성들에게 아직 낯설고 믿음이 가지 않았다. 특히 대량 거래를 해야 하는 상인들은 화폐 교환 과정에서 재산이 노출된 데다 지폐 가치가 하락하면 큰 손해를 볼 수가 있어 불만이 컸다.

 

호뀌리는 새 지폐의 유통을 위해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했다. 동전을 사용하거나 감추어만 두어도 화폐 위조죄와 같은 형벌을 가했고, 상인들이 물건값을 올리거나 심지어 마음대로 가게 문을 닫는 것조차 금했다.

 

호뀌리는 연이은 전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정세(丁稅) 즉 인두세를 대폭 인상했다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후유증을 겪었다. 왕이 된 뒤 이를 개선해 토지 소유량에 따라 세금 액수를 달리하고 빈민에게는 면세 혜택을 주었는데, 여전히 세율이 높아 백성들의 원한을 샀다.

 

또한 상선(商船)에 매기는 세금도 배의 숫자뿐 아니라 크기까지 고려해 액수를 정했는데, 역시 세율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불교 사원들도 개혁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했다. 왕과 귀족들의 기부가 쌓이면서 쩐왕조 말기 사원들은 막대한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세금과 부역을 피하기 위해 사원으로 몰려들어 일부는 승려가 되고 일부는 농노가 되었다.

 

종교계의 이익을 건드리는 것은 정권 탈취만큼이나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지만 호뀌리는 주저하지 않았다. 도첩이 없는 자들을 모두 사원 밖으로 내쫓았고, 승려들도 50세 미만은 다시 시험을 치러 합격해야만 자격을 주었다. 호뀌리는 승려들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했고, 참파와의 전쟁에 사원의 사병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호뀌리는 한편으로 유학을 적극 장려했다. 그 자신이 경서에 조예가 깊은 유학자이기도 했다. 호뀌리는 과거시험을 향시·회시·전시 3단계를 거쳐 3년마다 실시하도록 정례화했다.

 

1405년 과거시험에서는 170명이나 합격자를 냈는데, 이는 왕조 교체 과정에서 관리들을 대거 처형해 정부가 인력난을 겪고 있던 데다, 자신이 뽑은 관리들을 새 왕조의 지지기반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호뀌리는 과거시험 합격자 중 일부를 독학관으로 임명하고 전국 각지에 파견해 지방민들을 교육하도록 했다.

 

또한 호뀌리는 베트남 문자인 쯔놈의 사용을 장려하고 국가 법령에도 쯔놈을 쓰도록 해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그가 직접 쯔놈으로 시경을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국어시의(國語詩義)는 대궐에서 교재로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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