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12. 20:31ㆍ카테고리 없음
과감한 개혁으로 국내 질서를 수습한 호뀌리는 점증하는 명나라의 위협에 맞서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쩐왕조 말기 중원의 패자가 된 명나라는 아직 체제가 불안정하던 건국 초기에는 베트남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명은 홍건적의 난에서 시작된 원나라 축출 전쟁이 한창일 때 베트남에 먼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고, 1368년 주원장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베트남이 축하 사절을 보내 조공하자 유종(裕宗)을 안남국왕에 봉해 정식 국교를 맺었다.
그러나 국내 혼란을 수습하고 대외팽창이 가능할 만큼 힘을 갖추자 명나라는 강국의 본색을 드러내 베트남에게 갖은 요구를 해오기 시작했다. 운남성에서 일어난 소요를 진압하는 데 필요하다며 군량미 5천 석을 달라고 했고, 광서성 반란 토벌을 이유로 군량미 2만 석을 요구했다. 여기에 승려와 여자 안마사, 환관들까지 보내라고 통보했다.
오랜 전란에 시달린 베트남에게 너무 벅찬 요구들이었지만 호뀌리는 물자와 인력을 긁어모아 보내면서 어떻게든 명과의 충돌을 피하고 노력했다. 그러나 명의 비위를 맞춘다고 온전히 안전을 보장받을 수는 없음을 호뀌리도 알고 있었으며, 장차 일어날 수 있는 전쟁에 대비해 방어 준비를 서둘렀다.
귀족들의 사병에 크게 의존했던 쩐왕조와는 달리 호뀌리는 군 조직을 하나로 통합해 왕이 지휘하도록 바꾸었다. 병력 확보를 위해 호적을 다시 정비해 두 살 이상 남자는 모두 등록하게 하고 이를 회피하면 중죄로 다스렸다.
수군 강화를 위해 군함에 갑판을 하나 더 얹어 전투병의 활동공간을 넓히고 그 아래층에서 노를 젓도록 했다. 대형 어선들도 언제든 군함으로 쓸 수 있도록 개조했다.
무기를 많이 만들어 전국 4곳의 병기고에 쌓아놓고 유사시 병사들을 중무장시킬 준비를 했다. 명의 침략이 임박하자 호뀌리는 북부의 주요 강 기슭에 목책을 세우도록 했는데 그 길이가 400km나 되었다.
호뀌리는 즉위 1년 만에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황제 자리를 둘째 아들인 호한트엉(胡漢蒼)에게 물려주었다. 쩐왕조 명종의 외손자인 아들이 왕이 되면 왕권 찬탈에 대한 비난도 조금은 가라앉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물론 모든 실권은 여전히 호뀌리가 쥐고 있었다.
호뀌리는 명의 침략을 외교적으로 막아보기 위해 난징(南京)에 사신을 보내 새 왕에 대한 책봉을 요청했다. 베트남 사신은 명 황제에게 ‘쩐왕조에 후손이 없어 외손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당시 명은 태조 주원장이 적손자인 건문제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죽자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주체(영락제)가 베이징에서 반란을 일으켜 격전 끝에 정권을 장악한 직후였다. (1402년 6월)
명 조정이 베트남의 정변을 모를 리 없었지만 3년여에 걸친 내란을 수습하느라 당장은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베트남에 사신을 보내 형식적인 조사를 벌인 뒤 명은 호뀌리의 아들을 안남국왕으로 책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