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0. 12:01ㆍ카테고리 없음
그의 욕망은 거의 병에 가까웠다. 오백 년을 나뉘어 싸워온 중국의 일곱 나라를 통일하고도 진시황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세상의 끝까지 손에 쥐려 하였다. 전쟁은 멈추지 않았고, 침략당한 나라뿐 아니라 중국의 백성들도 대규모 원정을 수행하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사마천의 「사기」는 당시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법은 엄하고 정치는 가혹했으며 아첨하는 자가 많아 매일 그들의 칭송만 듣다 보니 뜻이 커지고 마음은 교만해졌다. 그 결과 위세를 나라 밖까지 떨쳐보고 싶은 마음에 몽염을 시켜 장병들을 이끌고 북쪽의 흉노를 치게 했다. 영토를 개척하여 국경을 넓히고 북하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말먹이와 군량을 실은 수레를 뒤따르게 했다.
다시 위나라 사람 도수를 시켜 수군을 이끌고 남월을 공격하게 하고 관리들에게 운하를 파게 해 운송한 군량으로 월(越)의 땅 깊이 들어가자 월인들은 모두 도망가 숨었다. 하는 일 없이 세월이 지나 양식이 떨어지자 이를 안 월인들이 반격해 진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진나라가 다시 조타를 시켜 군졸들을 이끌고 월나라 지역을 지키도록 했다.
이때 진나라의 환란은 북쪽 흉노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월에 걸쳐 쓸모없는 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데 있었다. 그러기를 10여 년 동안 장정들은 갑옷을 입고 젊은 부녀자들은 군수물자들을 실어 나르느라 당하는 고생을 참지 못하고 삶을 포기하여 길가 나무에 목을 매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윽고 진시황이 죽자 천하에 대란이 일어났다.”

진시황의 통일전쟁 과정에서 옛 월나라 땅에 살던 백월족이 대거 남쪽으로 이주했다. 중국을 통일하고 2년 뒤인 기원전 219년, 진나라 군대가 이들을 쫓아 전국시대의 국경을 넘었다. 진시황은 진나라 출신 도휴를 총사령관에, 임효와 연나라 출신 조타(趙佗) 등을 부장으로 임명했다.
중국의 사서들은 당시 진나라군 병사가 50만 명이었다고 기록했는데, 다소 과장이 섞인 것으로 보이지만 전례 없는 대규모 원정군이었음은 분명하다. 대군의 이동과 보급품 수송을 위해 상수와 이수을 연결하는 갑문식 운하 영거(靈渠)를 건설할 정도로 진시황은 남부의 원정에 공을 들였다. 진시황이 노린 지역은 지금의 복건성과 광동성, 광서성, 호남성, 귀주성을 아우르는 중국 남부 전체의 광활한 영역이었다.

도휴는 군대를 다섯으로 나누어 진격해 들어갔다. 백월족이 워낙 넓게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그물을 펼치듯 길을 나누어 진군하다 큰 저항을 받으면 다시 군사를 모아 대처한다는 전략이었다.
초기 전황은 순조로웠다. 도휴는 한 부대를 이끌고 서쪽의 서구(西歐) 지역으로 진공해 많은 부락을 무너뜨리고 그곳 군장을 살해했다. 백월족은 그러나 항복하지 않고 밀림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군장을 추대하여 계속 저항했다.
도휴가 점령지 주민들을 학살하자 분노한 백월족의 항전 의지는 더욱 높아졌다. 도휴는 3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밀림 속으로 쫓아 들어갔는데 이것은 적을 과소평가한 실수였다. 백월족은 낯선 지형에서 당황해하는 진나라군을 야습해 도휴를 죽이고 전군을 몰살시켰다.
도휴의 패전 소식이 전해 듣고 부장 임효는 자기 부대의 진로를 바꿔 백월족의 배후로 돌아 들어가 이를 격파했다. 진시황은 임효를 새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조타도 동쪽 지역을 맡아 연승을 거두고 피정복민에게 유화책을 펴 민심을 안정시켰지만, 임효의 공을 더 크게 인정한 것이다.
임효는 지공(遲攻)을 선택해 조금씩 점령지를 넓혀나가 4년 만에 오령산맥 아래 영남지방을 모두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진나라는 이곳에 남해군과 계림군, 상군의 세 개 군을 설치하고, 중국에서 수십만 명을 이주시켜 현지인과 섞여 살도록 했다. 임효는 남해군 책임자인 남해위(南海尉)에, 조타는 그 아래 직책인 현령에 임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