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17. 09:37ㆍ카테고리 없음
레러이는 지금의 베트남 중북부 타잉화(탄호아)성 람선 지방에서 대지주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 큰 부를 이뤄 머슴만 천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유복한 집안에서 활달하게 자란 레러이는 야심 많고 호방하며 벗들을 좋아하는 풍운아로 성장했다. 그의 성격으로 볼 때 만약 평화 시기였다면 평판 나쁜 젊은이들을 끌고 다니는 부잣집 아들로 그쳤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절박한 시대의 요구가 그를 영웅의 길로 이끌었다.
쩐꾸이 황제가 침략자 명나라에 맞서 봉기하자 피 끓는 청년 레러이는 주저 없이 가담했고 이내 반란군 장군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수년간의 투쟁이 무위로 끝나고 반란이 진압 당하자 그는 조용히 고향 람선으로 돌아왔다.
반란군 수뇌부였음에도 레러이는 목숨을 보전했음은 물론 명나라 식민정부에서 소금 밀매를 단속하는 순검 자리를 얻기까지 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한데, 베트남 사서들은 레러이가 구국의 뜻을 품고 인재를 모으는 과정이었다고만 간략히 설명한다.
분명한 것은 레러이는 대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나 행동도 개의치 않을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레러이에게 많은 지사들이 모여 들었다. 일가나 고향 사람들이 많았지만, 응우옌짜이와 쩐응우옌한처럼 멀리서 레러이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이들도 있었다. 특히 응우옌짜이는 레러이의 책사(策士)로서 독립전쟁 중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응우옌짜이는 당대의 대학자였다. 아버지가 쩐왕조 말기에 과거에 합격했지만 서민 출신이라 관직을 얻지 못하고 있다가 호 왕조 때 고위직에 등용되었고, 자신도 호 왕조 출범 첫해에 태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명나라가 쳐들어오자 이것이 죄가 되어 아버지는 중국으로 끌려가 죽었고 자신은 투옥됐다 풀려나 천하를 떠돌며 민족 해방의 길을 모색했다.
레러이를 만나 응우옌짜이는 그의 지도자 자질을 알아보고 ⌜중국을 타도하기 위한 전략 (平吳策)⌟이라는 책을 써서 바쳤다. 레러이도 응우옌짜이의 능력을 높이 사 크고 작은 투쟁의 방향을 세우는 중책을 맡겼다.
응우옌짜이는 독립 투쟁을 단순히 군사상 승패에 국한하지 않고 이념 대결, 대국민 선전전에서도 우위에 설 수 있도록 노력했다. 거의 모든 대내외 문서를 직접 작성했는데, 전시에 그것은 심리전의 한 부분이었으며 전후에는 피 흘리지 않고 베트남 독립을 보장받는 외교의 핵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