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된 평화

2021. 7. 21. 21:00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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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어깨가 축 처진 패잔병들을 데리고 돌아왔던 람선에 레러이는 이제 개선장군처럼 귀환했다.

 

레러이가 명나라와 싸워 비겼다는 소식에 용기를 얻은 젊은이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레러이는 그들을 여러 곳에 나누어 비밀리에 훈련시키는 한편, 꼼꼼한 응오뚜(Ngô Từ)를 시켜 군량미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베트남 람선 평야
베트남 람선 평야

휴전 중에도 양측의 탐색과 심리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레러이는 청항서(請降書)를 써서 명에 보냈다. 청항서에서 레러이는 자신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지현(知縣)과의 불화 때문이지 명에게 반항할 뜻은 없었다면서 관대한 처분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명은 이를 받아들여 레러이에게 여러 차례 어염과 곡물 농기구를 하사하며 타잉화를 다스리는 관리로 임명하겠다고 회유했다. 레러이는 감읍한 표정을 지으면서 명 관리들을 융숭히 대접했다. 그리고 명 진영에 부하들을 보내 금 은을 답례로 전달했다.

 

사자들이 오갈 때마다 서로 적정을 살피려 애를 썼는데, 레러이는 명의 관리들이 오면 무기와 식량을 숨기고 병사들에게 민간복을 입고 있도록 했다.

 

응우옌짜이(Nguyễn Trãi)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는 각종 수단을 통해 람선의 봉기가 왕조의 부활이 아니라 구국전쟁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이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고, 특히 베트남인들로 구성된 명나라 지방군 병사들을 동요시켰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명 지방군 병사들이 탈영해 레러이 진영에 합류했다.

 

그렇게 1년여가 흐르면서 양측의 긴장이 고조되고 간헐적인 충돌이 빚어졌다.

 

1424년 가을 진지 총병관은 명나라 새 수도인 베이징에 서신을 보내 람선 봉기군의 수상한 동향을 보고하며 휴전을 깨고 초동진압할 지 여부를 물었다. 그러나 영락제가 사망하고 홍희제가 등극하는 와중에 베이징에서 이를 숙고해 결정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도 선제공격으로 전쟁의 시기와 장소를 결정한 쪽은 레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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