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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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교체 12) 삼번의 난과 배신자 말로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하는 데는 항복한 명나라 장수들의 역할이 컸다. 청나라는 전쟁이 끝난 뒤 이들에게 각지의 총독 순무 등의 자리를 나눠주었다. 특히 공이 큰 오삼계는 운남성, 경중명은 복건성, 상가희는 광동성의 번왕으로 임명했다. 번왕은 온갖 특혜가 보장되는 작위였다. 독자적인 군대를 보유할 수 있는 데다, 정치 경제적으로 독립되고, 세습까지 가능했다. 오삼계 등 번왕들은 영지에서 세력을 더 키워 나갔다. 직할 병력과 세수 지역을 마음대로 넓히고, 주변 성들의 인사까지 개입했다. 대륙 정복 초기에는 청나라 조정이 이를 참아넘겼다. 절대다수인 한족에게 만주족의 지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때까지는 번왕 등 한족 협력자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새로운 황제가 된 강희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2021.08.30 -
명청교체 10) 명나라의 허무한 최후
기근과 수탈이 가중되면서 명나라 전역에 농민들의 반란이 들끓었다. 봉급이 끊긴 지방의 병사들은 굶다 못해 탈영해 반란군에 가담했다. 명나라 조정은 반란을 겨우 진압해갈 뿐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1636년 청나라로 국호를 바꾼 만주족의 압박이 계속되면서, 그나마 부족한 재정을 국경 방어에 쏟아부어야 했기 때문이다. 농민 반란군 가운데 이자성의 세력이 점점 커졌다. 이자성은 집안이 몰락하고 자신이 일하던 역관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자 어쩔 수 없이 반란에 가담했다. 이자성은 다른 반란군과 달랐다. ‘백성을 구하자’는 명분을 내세워 관청에서 빼앗은 곡식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자신을 의적으로 선전한 것이다. 이자성은 반란군 두목이 되고도 졸병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어 부하들의 신망을 ..
2021.08.28 -
명청교체 1) 맨손으로 시작한 누르하치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는 1559년 요동반도 소자하 강변의 작은 성 허투알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여진족 족장이었지만 일가가 세력을 잃어 주변 부족들의 눈치를 보며 사는 처지였다. 당시 여진족은 명나라의 분열정책 때문에 수십 개 부족으로 나뉘어 갈등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학대를 받았다. 일찍 결혼한 뒤에는 분가해 인삼을 캐고 장사를 하며 힘겹게 살았다. 여진족은 몽골족과 달리 순수한 유목민이 아니었다. 산에서 채취한 인삼과 동물 가죽을 명나라 조선에 팔고 식량을 들여오는 무역에 크게 의존했다. 명나라는 이 무역 허가권으로 여진족을 조종했다. 당시 명나라의 동북면 책임자는 이성량이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됐던 이여송의 아버지이다. 이성량은 수많은 전투에서 여진족..
2021.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