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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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한 무제의 침략
왕과 태후의 매국 행위로 나라가 통째로 넘어갈 판국이었다. 승상 르기아를 중심으로 한 백월족 귀족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남비엣 조정에서는 친한파(親漢派)와 반한파(反漢派) 사이에 격렬한 정쟁이 벌어졌다. 승상 르기아는 남비엣의 세 임금을 섬긴 노신으로 집안에 고관대작이 70명이 넘었고 왕실과 몇 겹의 혼인 관계를 맺은 명문가 출신이었다. 나라에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많아 왕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태후가 르기아를 죽이자고 재촉했지만, 애왕과 한나라 사신들은 그를 해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 무제는 답답한 상황을 보고받고 한천추에게 병사 2천 명을 주며 남비엣으로 가 르기아를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한 무제는 남비엣 합병이 단지 정쟁 때문에 미뤄지는 것이고 르기아만 체포하면 걸림돌이 모두 사라질 ..
2021.05.11 -
나라가 자주성을 잃었을 때
찌에우다는 무려 70년 동안 남비엣을 통치한 뒤 기원전 137년 사망했다. 이와 함께 남비엣의 황금기도 저물어갔다. 찌에우다의 후계자들은 그의 기상을 물려받지 못했다. 찌에우다의 왕위를 손자인 문제(文帝)가 이었다. 즉위 2년 뒤 민월(閩越)의 왕이 남비엣을 공격해왔다. 그동안 찌에우다에게 눌려있던 민월이 남비엣 정권 교체의 틈을 노려 반전을 시도한 것이었다. 당연히 문제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자신과 국가의 명운을 걸고 싸웠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한나라에 도움을 청한 것이다. 한나라는 왕회와 한안국 두 장군을 보내 민월을 치도록 했다. 과거의 한나라가 아니었다. 고조 유방이 흉노에게 참패한 뒤 한나라는 가능하면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고립주의를 채택했다. 그 결과 한나라는 ..
2021.05.11 -
남비엣은 황제의 나라
평탄했던 남비엣과 한나라의 관계는 십여 년 뒤 큰 고비를 맞았다. 고조가 죽고 그의 억척스러운 아내 여치(呂雉)가 태후가 되어 어린 황제 대신 통치했다. 관리 한 명이 여 태후에게 남비엣으로의 철 수출을 금해달라고 주청해 그렇게 시행했다. 수입한 철제 무기와 농기구로 남비엣이 세력을 키우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발끈한 찌에우다는 이를 장사왕 오예의 계략으로 간주했다. 한나라 장수였던 오예는 내전 때의 공으로 장사군과 예장군 상군 계림군 남해군을 영지로 하는 장사왕에 책봉됐다. 그러나 상군과 계림군 남해군을 이미 찌에우다가 장악하고 있어 장사왕의 영지가 어정쩡해졌다. 찌에우다는 장사왕이 한나라 황실의 힘을 빌어 자신을 멸망시키고 영지를 빼앗으려 음모를 꾸몄다고 본 것이다. 찌에우다는 한나라와의 군신관계를..
2021.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