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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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러이 황제가 되다
명나라 식민세력을 베트남에서 몰아냈지만, 국제질서의 재정립과 피폐해진 국토의 부흥에는 그 뒤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레러이는 1428년 4월 스스로 황위에 올라 국호를 다이비엣(大越) 연호를 투언티엔(順天)으로 정했다. 레러이가 세운 왕조는 500년 전 레호안이 세웠던 레(黎)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후레(後黎)왕조라고 부른다. 레러이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베트남의 왕으로 책봉해달라고 요청했다. 명은 이를 거부하고, 쩐왕조를 복원시키라며 쩐까오를 안남국왕으로 지명한 뒤 사신까지 보내 축하했다. 쩐까오는 레러이가 한 해 전 평화회담을 위해 급히 옹립한 허수아비 왕이었다. 불쌍한 쩐까오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음을 알고 달아나다 레러이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독약을 마셨다. 베트남에 큰소리는 쳤..
2021.08.04 -
대명 2차 봉기 2) “레러이가 살아있다”
명나라군은 레러이를 처형해 봉기를 완전 진압했다고 믿고 각자의 주둔지로 철수했다. 그리고 레러이도 정적에 쌓인 람선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패배였지만 레러이는 단념하지 않았다. 진지를 보수하고 식량을 구하고 병사들을 다시 모았다. 대지주의 아들로 지역 유력 가문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이 그의 재기를 도왔다. 람선 봉기군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갔다. 명나라가 몇 번이나 람선의 저항을 멸절시킬 기회를 놓쳤던 것은 레러이의 인내심과 베트남 백성들의 싸우겠다는 의지뿐 아니라, 명 관료들의 경직된 사고에도 큰 원인이 있었다. 탕롱의 식민정부는 한정된 군사력으로 다수의 원주민을 제압하기 위해 큰 도시에 대부분의 병력을 주둔시켜 방어의 이점을 얻고 반란이 일어나면 병력을 모아 일거에 진압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 거점..
2021.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