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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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식민지배 2) 후쩐(後陳)왕조의 봉기
오랜 세월 자주권을 누렸던 베트남인들이 명나라의 지배에 순응할 수는 없었다. 명의 원정권 사령관이었던 장보(張輔)가 종전 몇 달 뒤 귀국하자 곧바로 반란이 일어났다. 여러 독립투쟁 세력 가운데 쩐왕조 8대 황제 예종의 아들로 알려진 쩐꾸이(陳頠)가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407년 황제를 자칭해 간정제(簡定帝)라 불리었으며 연호까지 제정했다. 이를 후쩐(後陳)왕조라고 부른다. 쩐꾸이는 그동안 명에 협조해 세력을 유지해왔던 여러 옛 쩐 왕족들의 귀부를 받아 힘을 키운 뒤 응에안 지방에서 탕롱을 향해 진격했다. 쩐꾸이의 군대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과 관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와 뒤를 따랐다고 기록돼 있다. 놀란 명 조정은 운남성에 주둔하고 있던 목성(沐晟)에게 예하 병력 4만 명을 이끌고 가 탕롱의 명나라..
2021.07.16 -
베트남이 중국을 침략하다
송나라에 왕안석이 있었다면 베트남에는 리트엉끼엣(李常傑)이 있었다. 그의 본명은 응우옌뚜언이다. 하급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17살 때 기병 장교로 임관한 뒤 승진을 거듭해 국왕경호대장이 되었다. 뛰어난 용맹과 지략과 충성심을 겸비한 그는 왕실의 성(姓)을 하사받아 리트엉끼엣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모든 조정 신료들로부터도 깊은 신뢰를 받았다. 성종(聖宗)이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자 대비가 섭정을 했지만 국가의 주요 정책은 리트엉끼엣이 사실상 모두 결정했다. 리트엉끼엣은 송나라에 보내놓았던 첩자들로부터 광서성 성도인 옹주(邕州)를 비롯해 중국 국경도시들에 병력과 물자가 집결하는 등 수상한 움직임이 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송의 침략이 예정된 것이라면..
2021.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