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병(4)
-
명청교체 5) 현명했던 광해군
명분을 앞세우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광해군은 외교에 관한 한 보기 드문 혜안을 가진 왕이었다. 그는 국제정세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정보수집에 노력했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에 시달리던 해서여진 울라 부족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1610년 조선에 관직과 교역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광해군은 울라 부족장에게 관직을 하사하면서 만주의 정세를 자세히 탐문했다. 다음 해 역관 하세국이 건주여진에 포로로 잡혀있다 돌아오자, 광해군은 그를 환영하며 정6품 사과(司果) 벼슬을 제수했다. 그의 견문과 여진어 실력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광해군은 신하들에게 건주여진에 사람들을 계속 보내 동향을 파악하라고 강조했다. 그들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야 상호 오해로 인한 충돌을 막을 수 있었다. 대여진 외교의 최종 목표는 전쟁 예방..
2021.08.23 -
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1) 자만이 부른 패배
1287년 11월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친 몽골군은 베트남 국경을 다시 넘었다. 쿠빌라이의 아들 토곤이 이번에도 총사령관을 맡아 몽골족 정예군 7만 명을 지휘했다. 중국 운남성과 해남성에서 징발한 현지인 2만1천 명이 협공 부대를 편성했고, 아바치가 이끄는 1천 명의 돌격대가 선봉에 섰다. 그리고 오마르의 수군이 500척의 대선단으로 육군의 진격을 지원했다. 쿠빌라이는 역전의 노장인 아릭카이야, 나시루딘과 자신의 손자인 테무르까지 베트남 공격에 합류시키는 등 원정의 성공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몽골은 베트남의 청야(淸野) 전술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군량을 모두 바닷길로 운반해 간다는 계획이었다. 이미 이전 2차 침략 때부터 몽골은 군사전술에 큰 변화를 감수했다. 본래 군수품의 현지 조달이 몽골군..
2021.06.24 -
몽골의 1차 베트남 침략 (2) 인내의 승리
몽골군은 쉽게 베트남 수도 탕롱을 점령했지만 텅 빈 도시에서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린 데다 병사들 사이에 낯선 풍토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우량하타이는 시간이 없었다. 이제 곧 시작될 송나라 침공전에서 남쪽의 일익을 맡아야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이라는 나라를 겁만 줘도 쉽게 굴복시킬 수 있는 남쪽의 야만인 부족쯤으로 여겼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나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우량하타이는 사신을 보내 화의를 제의했지만 베트남은 단호히 거절했다. 적군의 초조함을 알아차린 베트남군이 반격을 시작했다. 남쪽으로 퇴각했던 베트남군은 몰래 홍강을 건너 탕롱 건너편에 있는 동보더우의 몽골군 주둔지를 공격해 점령했다. 비록 작은 요새였지만 개전 후 처음으로 베트남군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강..
2021.06.14 -
독립의 꿈은 홍강에 떨어지고
쯩짝과 그녀의 참모들은 교착 상태를 타개할 방법을 숙고했다. 그러나 이미 견고하게 다져진 한나라군의 방어망을 뚫어낼 묘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까운 시간만 자꾸 흘러갔다. 사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쯩짝의 군대가 개전 초 국경에서부터 한나라군의 배후를 공격해 보급로를 끊고, 예상하지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기습하고, 그래도 패하면 물러나며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우기가 되면 분산된 적을 공격해 이동을 강요하고, 낯선 지형에 고립시켜 섬멸하는 전술을 사용했으면 이길 수도 있었다. 다만 이런 베트남의 유격전과 전격전 청야전술은 그 후 오랜 세월 수많은 피를 대지에 뿌리며 체득한 것이지, 그 이전의 인물이자 실전 경험조차 없는 쯩짝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쯩짝의 군대와 마원의 ..
2021.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