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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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 3차 봉기와 휴전협정
레러이는 적의 공격을 앉아서 기다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타잉화로 이동해 대공세를 준비 중이던 명나라 진지 총병관을 레러이가 선제공격했다. 진지의 대군이 추격해오자 데오옹에서 또 한 번 매복 공격으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명나라 주력군의 전력은 만만치 않았다. 잔인한 진압작전이 계속되면서 람선 봉기군은 서부 산악지대로 밀려 들어가 라오스 국경까지 퇴각해야 했다. 여기서 레러이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라오스 왕은 베트남 독립군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명과 관계가 틀어져 좋을 게 없고, 장차 베트남이 독립해 강국으로 부활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라오스 왕은 레러이를 돕겠다며 병사 2만 명과 코끼리 100여 마리를 보내왔다. 람선 봉기군은 아무런 의심 없..
2021.07.21 -
대명 2차 봉기 1) 숭고한 희생
람선 봉기군은 빠르게 세력을 회복했다. 레러이는 새로 모인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성을 쌓고, 기동전에 대비해 곳곳에 식량을 숨겨두었다. 그는 위축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백성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과감한 군사 작전을 계획했다. 이번에는 람선 동쪽 명나라군 주둔지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당시 명 원정군은 탕롱 등 홍강 유역에 주로 배치됐고, 중부와 남부의 다수 지역은 귀순한 베트남 군벌들에게 수비를 맡기었다. 이른바 지방군이었는데, 명에서 온 중국인 부대에 비해서는 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레러이가 노린 약한 고리였다. 레러이는 병사들을 므엉못 산 입구에 매복시키고 명나라군을 유인하기로 했다. 소수의 람선 병사들이 명나라군 기지를 공격하다 후퇴하자, 아니나 다를까 적 병사들이..
2021.07.19 -
대명 1차 봉기 2) 게릴라전의 창시자
명나라의 반응은 빨랐다. 레러이의 봉기 일주일 만에 타잉화 주둔군이 진압을 위해 몰려왔다. 람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병력과 무장과 훈련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봉기군이 패해 쫓기는 처지가 됐다. 베트남 사서는 봉기군이 락투이에서 험한 지형을 이용해 매복해 있다 추격해 온 적을 기습해 대승을 거두었다고 기록했다. 명나라군은 병력을 보강받아 재차 공격해왔다. 봉기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고, 레러이의 부인과 자식들까지 사로잡혔다. 레러이와 봉기군 지도자들은 명나라군의 진격을 막아가며 부근 치링산으로 겨우 퇴각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밀림은 나무가 모두 활엽수라는 점 말고는 겉모습이 우리나라 숲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밀림 안으로 들어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강렬한 열대의 햇볕 덕분에 바닥에 관목이 ..
2021.07.18 -
참파를 만만히 보았다가
몽골은 먼저 베트남 남쪽의 참파부터 공격했다. 몽골은 참파에 행중서성(行中書省) 즉 중앙정부기관인 중서성의 출장소를 설치했다. 이는 남해무역을 장악하고 장차 벌어질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병력을 차출하겠다는 의도였다. 베트남을 고립시키고 남북에서 동시에 공격하겠다는 군사적 목적도 있었다. 멀쩡한 남의 나라에 지방관청을 설치했으니 참파가 두 눈을 뜨고 이를 지켜볼 수는 없었다. 인적 물적 수탈은 물론 자칫 국권까지 그대로 넘어갈 판국이었다. 하릿지 태자 등 참파의 강경파들이 몽골 관리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격분한 몽골은 즉시 원정군을 보냈다. 쿠빌라이는 송나라 정복에 공을 세우고 천주 성주로 봉해져 있던 소게투를 차출해 지휘를 맡겼다. 1282년 음력 12월, 350척의 배에 나눠 탄 만여 명의 몽골..
2021.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