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12)
-
긴장된 평화
매번 어깨가 축 처진 패잔병들을 데리고 돌아왔던 람선에 레러이는 이제 개선장군처럼 귀환했다. 레러이가 명나라와 싸워 비겼다는 소식에 용기를 얻은 젊은이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레러이는 그들을 여러 곳에 나누어 비밀리에 훈련시키는 한편, 꼼꼼한 응오뚜(Ngô Từ)를 시켜 군량미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휴전 중에도 양측의 탐색과 심리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레러이는 청항서(請降書)를 써서 명에 보냈다. 청항서에서 레러이는 자신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지현(知縣)과의 불화 때문이지 명에게 반항할 뜻은 없었다면서 관대한 처분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명은 이를 받아들여 레러이에게 여러 차례 어염과 곡물 농기구를 하사하며 타잉화를 다스리는 관리로 임명하겠다고 회유했다. 레러이는 감읍한 표정을 지으면서 명 관리들을..
2021.07.21 -
그곳에 가면) 호왕조의 수도
호뀌리는 이곳에서 수많은 피를 뿌린 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호뀌리는 임금인 순종(順宗)을 끌고 타잉화로 가 새 수도를 세우고 서도(西都)라고 이름 붙였다. 지금의 타잉화성 빈록현이다. 하노이시에서 남쪽으로 150km 그리고 타잉화시에서는 북서쪽으로 45km 떨어져 있다. 서도 주변은 옛 왕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시골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면 들판 한 가운데 웅장한 성의 유적이 나타난다. 돌로 만든 동서남북 네 개의 성문과 성벽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다. 성채는 남북으로 870m 동서로 883m의 거의 정사각형 모형이며, 정문이라 할 수 있는 남문이 높이 9.5m 폭 15m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웅장한 크기이다. 동남아시아에 현존하는 유일한 석조 성채이며, 독창적인 건축술로 ..
2021.07.15 -
다가오는 전쟁의 먹구름
대내외 정책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 호뀌리는 과거 침략에 대한 복수와 향후 대명 전쟁 시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참파를 공격했다. 참파는 포 비나수르가 죽은 뒤 다시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호뀌리는 즉위한 해에 참파를 공략했다가 실패했지만, 2년 뒤 재정비된 군대를 보내 대승을 거두었다. 참파 국왕은 영토 일부를 떼어주며 강화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세가 오른 호뀌리는 아예 참파를 병합할 목적으로 1403년 20만 대군을 일으켜 침략했다. 베트남군은 수도 비자야를 포위했지만 참파군이 끈질기게 저항하고 한 달 만에 군량이 떨어지자 철수하고 말았다. 망국의 위기에 놓인 참파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청했고, 명이 이를 받아들여 전쟁을 중단하도록 베트남에 중재했다. 베트남의 약세..
2021.07.13 -
무섭게 일어선 참파
참파는 고질적인 분열로 스스로의 발전을 가로막은 나라였다. 오늘날 베트남 중부 평야지대에 있던 참파는 비옥한 토지 덕분에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했다. 그리고 멀리 중동에서부터 중국을 잇는 해상 중계 무역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경제력으로 치면 베트남을 능가하는 참파였지만 1300년 동안 15개 왕조가 교체될 정도로 왕위 다툼이 끝없이 반복됐다. 참파를 단일 국가로 보지 않고 여러 국가의 연합체로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더구나 14세기 이슬람교가 들어오면서 전통 힌두교와 종교 갈등까지 벌어졌다. 수십 년간 유례없는 혼돈 상태가 계속됐다. 그러다 1360년 이슬람 세력이 지지하는 포 비나수르가 오랜 내전을 끝내고 모든 경쟁세력을 하나의 체제로 묶어내며 왕위에 올랐다. 베트남에서는 포 비..
2021.07.06 -
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7) 전쟁 이후
육로로 퇴각하던 몽골군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베트남군의 매복 공격에 시달리던 토곤은 병력을 소규모로 산개해 후퇴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유목민족 군대의 특기로 농경민족을 침략할 때 정규군과의 교전을 피하고 싶으면 수십 명 단위로 흩어져 지나친 뒤 순식간에 다시 집결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 전술은 소규모 부대가 마주치는 현지 주민들이 싸울 능력과 의지가 없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몽골 병사들 앞에는 결사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베트남 농민들이 있었다. 2차 대몽항전이 끝나고 몽골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호의를 침략과 학살로 되돌려 받은 베트남인들은 몽골 패잔병을 살려 보내지 말아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결국 몽골 육군 중 살아서 국경을 넘어간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토곤은 겨우 목숨을 건져 귀국했..
2021.07.02 -
몽골의 1차 베트남 침략 (2) 인내의 승리
몽골군은 쉽게 베트남 수도 탕롱을 점령했지만 텅 빈 도시에서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린 데다 병사들 사이에 낯선 풍토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우량하타이는 시간이 없었다. 이제 곧 시작될 송나라 침공전에서 남쪽의 일익을 맡아야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이라는 나라를 겁만 줘도 쉽게 굴복시킬 수 있는 남쪽의 야만인 부족쯤으로 여겼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나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우량하타이는 사신을 보내 화의를 제의했지만 베트남은 단호히 거절했다. 적군의 초조함을 알아차린 베트남군이 반격을 시작했다. 남쪽으로 퇴각했던 베트남군은 몰래 홍강을 건너 탕롱 건너편에 있는 동보더우의 몽골군 주둔지를 공격해 점령했다. 비록 작은 요새였지만 개전 후 처음으로 베트남군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강..
2021.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