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벌(3)
-
대명 2차 봉기 2) “레러이가 살아있다”
명나라군은 레러이를 처형해 봉기를 완전 진압했다고 믿고 각자의 주둔지로 철수했다. 그리고 레러이도 정적에 쌓인 람선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패배였지만 레러이는 단념하지 않았다. 진지를 보수하고 식량을 구하고 병사들을 다시 모았다. 대지주의 아들로 지역 유력 가문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이 그의 재기를 도왔다. 람선 봉기군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갔다. 명나라가 몇 번이나 람선의 저항을 멸절시킬 기회를 놓쳤던 것은 레러이의 인내심과 베트남 백성들의 싸우겠다는 의지뿐 아니라, 명 관료들의 경직된 사고에도 큰 원인이 있었다. 탕롱의 식민정부는 한정된 군사력으로 다수의 원주민을 제압하기 위해 큰 도시에 대부분의 병력을 주둔시켜 방어의 이점을 얻고 반란이 일어나면 병력을 모아 일거에 진압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 거점..
2021.07.20 -
분노한 한 무제의 침략
왕과 태후의 매국 행위로 나라가 통째로 넘어갈 판국이었다. 승상 르기아를 중심으로 한 백월족 귀족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남비엣 조정에서는 친한파(親漢派)와 반한파(反漢派) 사이에 격렬한 정쟁이 벌어졌다. 승상 르기아는 남비엣의 세 임금을 섬긴 노신으로 집안에 고관대작이 70명이 넘었고 왕실과 몇 겹의 혼인 관계를 맺은 명문가 출신이었다. 나라에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많아 왕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태후가 르기아를 죽이자고 재촉했지만, 애왕과 한나라 사신들은 그를 해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 무제는 답답한 상황을 보고받고 한천추에게 병사 2천 명을 주며 남비엣으로 가 르기아를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한 무제는 남비엣 합병이 단지 정쟁 때문에 미뤄지는 것이고 르기아만 체포하면 걸림돌이 모두 사라질 ..
2021.05.11 -
남비엣은 황제의 나라
평탄했던 남비엣과 한나라의 관계는 십여 년 뒤 큰 고비를 맞았다. 고조가 죽고 그의 억척스러운 아내 여치(呂雉)가 태후가 되어 어린 황제 대신 통치했다. 관리 한 명이 여 태후에게 남비엣으로의 철 수출을 금해달라고 주청해 그렇게 시행했다. 수입한 철제 무기와 농기구로 남비엣이 세력을 키우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발끈한 찌에우다는 이를 장사왕 오예의 계략으로 간주했다. 한나라 장수였던 오예는 내전 때의 공으로 장사군과 예장군 상군 계림군 남해군을 영지로 하는 장사왕에 책봉됐다. 그러나 상군과 계림군 남해군을 이미 찌에우다가 장악하고 있어 장사왕의 영지가 어정쩡해졌다. 찌에우다는 장사왕이 한나라 황실의 힘을 빌어 자신을 멸망시키고 영지를 빼앗으려 음모를 꾸몄다고 본 것이다. 찌에우다는 한나라와의 군신관계를..
2021.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