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기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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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교체 4) 운명을 건 사르후 전투
여진족이 정면공격을 가해왔으니 명나라가 이를 정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했을 때에도 가정(家丁)이라 불리는 군벌들의 사병이 왜군을 격파하면 뒤에 있던 관군이 달려들어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그런데 이 사병들마저 계속된 내란 과정에서 거의 다 소모되었다. 병사들을 급히 징집해 20만 명 가까이 모았지만 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들이었다. 명나라는 동맹국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머뭇거리는 조선을 닦달해 11,500명을 파견받았다. 여진족 내 누르하치의 경쟁 세력인 예허부도 15,000명을 보내왔다. 특히 조선의 조총수들은 명나라에 절실하게 필요했던 정예병이었다. 명나라 장수들이 서로 이들을 데려가겠다고 싸웠다.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병부시랑 양호가 정벌군..
2021.08.22 -
명청교체 2) 후금 건국과 숨 막히는 압박
구러산 전투의 승리는 만주의 세력 판도를 바꿔놓았다. 여러 부족들이 누르하치를 새로운 강자로 인정했다. 몽골에서도 코르친 부족과 칼카 부족이 복종의 뜻을 전해왔다. 누르하치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인구가 적은 여진족이 명나라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몽골족과 제휴가 반드시 필요했다. 누르하치는 본인뿐 아니라 왕자들에게도 몽골족과 혼인을 적극 권장하여 두 민족의 융합에 노력했다. 누르하치는 해서여진 부족들을 각개격파해나갔다. 그들은 서로 사이가 나빠 단합하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그 틈을 파고들어 공격하거나 내정에 간섭하며 세력을 넓혔다. 해서여진 부족들을 놓고 예허부와 누르하치의 쟁탈전이 벌어졌다. 명나라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예허부의 편을 들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예허부 외에는 해서여진의 모든 부족들이 누르하치..
2021.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