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포(3)
-
명청교체 5) 현명했던 광해군
명분을 앞세우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광해군은 외교에 관한 한 보기 드문 혜안을 가진 왕이었다. 그는 국제정세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정보수집에 노력했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에 시달리던 해서여진 울라 부족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1610년 조선에 관직과 교역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광해군은 울라 부족장에게 관직을 하사하면서 만주의 정세를 자세히 탐문했다. 다음 해 역관 하세국이 건주여진에 포로로 잡혀있다 돌아오자, 광해군은 그를 환영하며 정6품 사과(司果) 벼슬을 제수했다. 그의 견문과 여진어 실력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광해군은 신하들에게 건주여진에 사람들을 계속 보내 동향을 파악하라고 강조했다. 그들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야 상호 오해로 인한 충돌을 막을 수 있었다. 대여진 외교의 최종 목표는 전쟁 예방..
2021.08.23 -
마지막 전투 2) 한순간의 방심
베트남군의 방어 계획은 유승의 지원군을 자국 영토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이며 지치게 한 뒤 탕롱에서 약 50km 떨어진 트엉 강가에 묶어두고 공격한다는 게 골격이었다. 국경 너머 명나라군 집결지점에서 탕롱까지 최단 거리를 살피면 명나라 지원군의 진격로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명나라군이 트엉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직전에 쓰엉지앙 성을 지나야 했는데, 베트남군은 이곳을 방어의 핵으로 삼기로 했다. 레러이는 쩐응우옌한 장군을 보내 명나라 이임 장군과 2천여 병사들의 결사적인 저항을 뚫고 성을 점령했다. 유승의 명나라 지원군이 국경을 넘기 열흘 전 일이었다. 그리고 쓰엉지앙 성 북쪽에 있는 치랑 계곡에 병사 1만 명과 코끼리 5마리를 매복시켜 1차 공격을 가하고, 그 아래 껀쩜에 병사 3만 명을 매복시켜 2차..
2021.07.31 -
베트남의 최무선
태상황 예종은 11살 난 자신의 막내아들을 다음 왕으로 지명했다. 그가 순종(順宗)이다. 레뀌리는 자신의 딸을 순종과 결혼시키며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지만, 참파의 침략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1389년 레뀌리는 타잉화 지방에 다시 들어온 참파군을 격퇴하기 위해 수군을 이끌고 출정했다가 계략에 속아 대패했다. 그는 전장에 부하들을 버리고 허겁지겁 도망쳐 왔다. 이 일로 레뀌리는 장수로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다. 군 총사령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나고 19살인 쩐캇쩐을 상장군으로 임명해 대참파전의 일선 지휘를 맡겼다. 100여 년 전 쩐투도가 몽골 침입을 앞두고 25살 쩐꾸옥뚜언을 군 총사령관으로 영입했던 예에 따른 것이다. 쩐캇쩐이 몽골 2차 침입 때 “북국의 왕자가 되느니 차라리 남국의 악귀가 되겠다”며 순..
2021.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