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레왕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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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영광은 사라지고
후레왕조는 제5대 성종(聖宗)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영화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497년 성종이 죽자 장남인 헌종(憲宗)이 제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부친 못지않은 현명한 왕이었지만, 불행히도 재위 6년 만에 44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 뒤 헌종의 셋째아들인 숙종(肅宗)과 둘째아들 위목제(威穆帝)가 차례로 즉위했는데, 숙종은 너무 어렸고 위목제는 정사보다 주색에 더 관심이 많았다. 위목제가 자신의 즉위에 반대했던 태황태후와 중신들을 살해하는 등 공포정치를 펼치자 사촌인 양익제(襄翼帝)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했다. 양익제는 전임자인 위목제의 부도덕성을 맹비난했지만, 그 역시 불필요한 토목공사에 백성들을 내몰면서도 본인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 원성을 샀다. 이들 황제들이 특별히 악하거..
2021.08.11 -
그곳에 가니) 후레왕조의 람낀(藍京)
명나라군을 축출하고 베트남 황제의 자리에 오른 레러이는 고향 람선을 방문해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자주독립 정신을 기리고 왕조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람선 마을의 추강(朱江) 북쪽에 사찰을 세운 뒤 그 일대를 람낀(藍京) 즉 ‘푸른 도읍’이라 이름 지었다. 레러이가 사망하자 후손들은 그가 사랑했던 고향으로 옮겨와 묻었고, 그 뒤 람낀은 후레왕조 역대 왕들의 영원한 휴식처가 되었다. 람낀에 왕릉과 사당들이 세워지고, 왕이 해마다 방문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머물 수 있도록 행궁이 건설됐다. 그리고 왕의 거처를 지킬 성벽과 그 외곽의 해자가 들어서면서 람낀을 문자 그대로 작은 도읍의 모습을 갖췄다. 후레왕조가 몰락하면서 람낀의 궁전과 사찰 사당들은 폐허가 됐다. 왕릉도 태조 레러이 등 다섯 황제 ..
2021.08.09 -
허약한 왕들과 권력투쟁
후레(後黎)왕조는 1433년 태조(太祖) 레러이가 사망하고 궁중 유혈사태와 반정으로 큰 혼란을 겪는다. 여기에는 왕자들의 권력욕뿐 아니라, 타잉화 출신의 무장인 개국공신들과 왕이 중앙집권을 위해 힘을 실어주려 한 탕롱 출신의 유학자 문관들의 세력다툼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2대 황제 태종(太宗)은 즉위 당시 겨우 11살 어린이였다. 태종은 아버지 레러이의 충신인 레쌋을 섭정으로 임명하고 모든 것을 의지했다. 레쌋은 피 흘려 세운 왕조에 무임승차한 눈엣가시 같은 문신들을 차근차근 제거하고 자기 측근들로 대체했다. 레쌋과 그의 후임자인 레응언 모두 무학자들로 유교보다는 어릴 때부터 익숙한 불교에 기울어져 있었다. 태종이 장성하자 개국공신들의 권력독점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문신들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는 유학..
2021.08.05 -
레러이 황제가 되다
명나라 식민세력을 베트남에서 몰아냈지만, 국제질서의 재정립과 피폐해진 국토의 부흥에는 그 뒤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레러이는 1428년 4월 스스로 황위에 올라 국호를 다이비엣(大越) 연호를 투언티엔(順天)으로 정했다. 레러이가 세운 왕조는 500년 전 레호안이 세웠던 레(黎)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후레(後黎)왕조라고 부른다. 레러이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베트남의 왕으로 책봉해달라고 요청했다. 명은 이를 거부하고, 쩐왕조를 복원시키라며 쩐까오를 안남국왕으로 지명한 뒤 사신까지 보내 축하했다. 쩐까오는 레러이가 한 해 전 평화회담을 위해 급히 옹립한 허수아비 왕이었다. 불쌍한 쩐까오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음을 알고 달아나다 레러이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독약을 마셨다. 베트남에 큰소리는 쳤..
2021.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