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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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전쟁의 먹구름
대내외 정책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 호뀌리는 과거 침략에 대한 복수와 향후 대명 전쟁 시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참파를 공격했다. 참파는 포 비나수르가 죽은 뒤 다시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호뀌리는 즉위한 해에 참파를 공략했다가 실패했지만, 2년 뒤 재정비된 군대를 보내 대승을 거두었다. 참파 국왕은 영토 일부를 떼어주며 강화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세가 오른 호뀌리는 아예 참파를 병합할 목적으로 1403년 20만 대군을 일으켜 침략했다. 베트남군은 수도 비자야를 포위했지만 참파군이 끈질기게 저항하고 한 달 만에 군량이 떨어지자 철수하고 말았다. 망국의 위기에 놓인 참파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청했고, 명이 이를 받아들여 전쟁을 중단하도록 베트남에 중재했다. 베트남의 약세..
2021.07.13 -
싸우자는 몽골, 피하려는 베트남
송나라가 마침내 무릎을 꿇자 이제 다음 목표는 베트남이었다. 쿠빌라이 대칸이 젊은 시절 대리국을 정복하면서 화려한 군사 경력의 막을 열었기 때문에, 그때 고락을 같이 했던 운남 주둔군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 군대가 베트남에서 겪은 패배를 쿠빌라이는 자신의 치욕으로 여겨 복수하고 싶어 했다. 그런 개인적 이유가 아니더라도 몽골에게는 동남아시아로 정복지를 넓혀 갈 전진기지로서 베트남이 꼭 필요했다. 베트남을 속국으로 만든다면 열대지방의 기후와 지형에 익숙한 현지인들을 용병으로 징발할 수 있고, 바다에 서툰 몽골군의 약점을 베트남 수군으로 보완해 남중국해를 지배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는 몽골에 패할 경우 경제적 수탈에 그치지 않고 전쟁도구로 내몰려 소모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민족의 존망을 걸고 저..
2021.06.18 -
소득 없는 송나라의 2차 침략
남부의 세 개 도시가 유린당한 사실에 송나라 조야는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송 신종은 즉시 곽달(郭達)을 토벌군 지휘관으로 임명해 베트남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송나라는 먼저 참파 및 크메르와 동맹을 맺어 베트남을 남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공격하도록 했다. 다만 사서에는 두 나라가 베트남 공격에 적극 참여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비록 두 나라가 베트남과 적대적이기는 했지만 중국이 베트남을 정복한 뒤에도 자신들과 계속 우호관계를 이어갈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보다는 두 강국이 싸워 서로 쇠약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1076년 송나라 대군이 베트남 국경을 넘었다. 탕롱을 향해 진격하던 송나라군은 느응우옛강 즉 지금의 꺼우강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병력의 수를 앞세워 그대로 밀고 내려가 ..
2021.06.02 -
무너진 송나라 원정군
980년 여름 송나라군 3만 명이 국경을 넘었다. 후인보가 이끄는 중군은 해안을 따라 이동하다 하롱을 지나 바익당 강 동쪽 기슭에 도착했다. 여기서 후인보는 좌군에 해당하는 수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송나라 우군은 손전흥의 지휘 아래 베트남 동북부 국경인 랑선을 통과해 치랑에 당도했다. 베트남군이 이들을 막아 보려 했지만 2천여 명의 전사자를 낸 채 연전연패했다.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송나라군은 중군 · 우군과 수군을 한데 모아 지금의 하노이인 다이라를 먼저 점령한 뒤 수도 호아루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유징 제독의 수군이 바다를 거쳐 바익당강을 거슬러 북상하려고 했지만 강어귀에서 저지됐다. 사서는 이를 송의 군선들이 강바닥에 박아놓은 말뚝에 걸..
2021.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