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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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남북조 시대
찡끼엠 사후 아들들의 권력투쟁을 틈타 막왕조가 침략해 왔을 때 응우옌황은 이를 격퇴하는 데 일조했다. 20년 뒤 찡뚱이 북진해 막왕조를 무너뜨린 뒤에는 탕롱으로 불려가 막왕조 잔당들을 소탕하는 데 동원됐다. 응우옌황은 묵묵히 소임을 다했지만 찡뚱은 자신의 휘하에 들어온 의심스러운 외삼촌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8년의 세월을 보낸 응우옌황은 중부 해안인 닌빈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겠다며 탕롱을 떠나 그대로 배를 타고 후에로 돌아갔다. 탕롱을 벗어나기 전 응우옌황은 찡뚱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과 손자까지 인질로 남겨두어야 했다. 또한 응우옌황의 딸을 찡뚱의 아들 찡짱에게 출가시켜 몇 겹의 친족관계를 맺었다. 서로를 의심하고 경쟁했지만 응우옌황과 찡뚱 때까지는 그래도 친척이라는 의..
2021.08.18 -
막왕조의 초라한 종말
타잉화에서는 응우옌낌이 차근차근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응우옌낌은 남쪽에 있는 응에안을 점령해 배후를 튼튼히 다진 뒤 북부 탕롱을 향해 진격했다. 타잉화의 경계를 넘어 썬남까지 육박해 들어갔지만, 위장 투항한 막당중의 부하 장군에게 응우옌낌이 독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응우옌낌의 사위 찡끼엠(鄭檢)은 급히 군사들을 수습해 타잉화로 퇴각했고 병권을 장악해 장인의 빈자리를 차지했다. 이로부터 약 60년 동안 북쪽에는 막씨왕조 남쪽에는 찡씨 세력이 자리를 잡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두 세력은 서로 공격과 수비를 주고받았지만, 막왕조가 찡씨의 영역으로 쳐들어가는 경우가 좀 더 많았다. 이는 막왕조가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홍강 유역에 자리 잡아 자원 확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세는 1562년 ..
2021.08.17 -
명나라의 베트남 정벌 소동
막왕조에 맞서 후레왕조를 복원시키려는 반란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응우옌낌(阮金)이 저항세력들을 규합해 베트남을 남북조 형세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막당중의 왕위 찬탈 때 라오스로 몸을 피했던 응우옌낌은 라오스 왕의 지원 아래 망명자들을 모아 후레왕조의 발원지인 타잉화로 돌아왔다. 그리고 비운의 황제 소종(昭宗)의 장남을 찾아내 새 황제로 추대함으로써 후레왕조 유신들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래도 군사력의 열세를 느낀 응우옌낌은 명나라의 도움을 얻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막왕조 군사들의 눈을 피해 천신만고 끝에 3년 뒤 베이징에 도착한 사신단은 막당중의 왕위 찬탈을 알리고 토벌을 요청했다. 이미 명나라 조정은 베트남의 정변을 파악하고 내전에 개입할지 여부에 대해 대논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
2021.08.14 -
계속되는 저항과 좌절
쯩짝의 반란 이후에도 베트남인들은 독자적으로 때로는 토착화한 중국 이주민들과 함께 저항을 이어갔다. 중국에서 후한이 망하고 삼국이 병립하는 시기에 베트남 땅은 오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그때 또 한 명의 여성 반란 지도자인 찌에우어우가 나타났다. 찌에우어우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오빠 찌에우꾸옥닷과 함께 살았다. 그녀가 20살 되던 해 오빠가 결혼했는데 올케의 구박이 심하자 살해하고 산속으로 도망쳤다. 힘세고 똑똑했던 찌에우어우는 갖가지 이유로 도망쳐온 장정 천여 명을 휘하에 거느리게 되었다. 그 사이 마을에서는 중국인 관리의 폭정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오빠 찌에우꾸옥닷의 인도로 반란을 일으켰고, 찌에우어우는 산에서 내려와 이에 합류했다. 그녀의 용맹을 보고 주민들은 그녀를 지도자로 세웠다. 찌에우어우는 “..
2021.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