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비엣(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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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비엣이 역사에 남긴 것
한나라의 당초 계획은 원정군을 다섯으로 나누어 남진하는 것이었다. 명장으로 칭송받던 노박덕이 계양에서 회수로 내려가고, 수군사령관 양복이 예장을 거쳐 횡포로 내려간다. 그리고 남비엣에서 귀순한 과선 장군과 하려 장군, 치의후가 각각 다른 길로 진격해 남비엣의 수도 반우에 집결하기로 했다. 그러나 원정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정규군인 수군은 곧바로 출동이 가능했지만, 주변에서 병사를 차출하고 한 무제가 사면령을 내린 죄수들을 군대로 편성하는 작업은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진노한 천자에게 기다려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준비가 된 부대부터 진격을 시작했다. 양복이 이끄는 수군 수만 명이 심협과 석문을 함락해 남비엣의 전함과 식량을 빼앗았다. 전처럼 한나라가 육로로 침략해올 것이라 예상하다 ..
2021.05.12 -
분노한 한 무제의 침략
왕과 태후의 매국 행위로 나라가 통째로 넘어갈 판국이었다. 승상 르기아를 중심으로 한 백월족 귀족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남비엣 조정에서는 친한파(親漢派)와 반한파(反漢派) 사이에 격렬한 정쟁이 벌어졌다. 승상 르기아는 남비엣의 세 임금을 섬긴 노신으로 집안에 고관대작이 70명이 넘었고 왕실과 몇 겹의 혼인 관계를 맺은 명문가 출신이었다. 나라에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많아 왕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태후가 르기아를 죽이자고 재촉했지만, 애왕과 한나라 사신들은 그를 해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 무제는 답답한 상황을 보고받고 한천추에게 병사 2천 명을 주며 남비엣으로 가 르기아를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한 무제는 남비엣 합병이 단지 정쟁 때문에 미뤄지는 것이고 르기아만 체포하면 걸림돌이 모두 사라질 ..
2021.05.11 -
남비엣을 세우다
임효는 선정을 베풀어 백월족의 민심을 다스렸고 농업과 교통을 발전시켰다. 조타도 중국 본토가 평화로웠다면 새 정복지의 한 부분을 다스리며 관료로서의 출세를 꿈꾸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절대 권력자인 진시황이 죽고 못난 아들 호해(胡亥)가 황제의 자리를 가로챈 뒤 세상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승과 오광이 농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자 삽시간에 수십만의 무리가 그 아래 모여들었다. 비록 진승과 오광은 몇 달 만에 진나라군에 진압됐지만, 천하 각지에서 반란군이 들고 일어났다. 이 무렵 남쪽에서도 생존을 위한 이합집산이 벌어졌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임효가 병이 들자 조타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군대를 일으켜 중원과 이어진 길을 끊고 스스로 방비하여 제후들이 일으킨 변고에 대비..
2021.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