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러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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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러이 동지들의 영광과 비극
암울했던 시절 레러이와 그의 동지들은 룽냐이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부귀영화를 바라는 게 아니라 백성을 위해 사악한 적을 물리치려는 것이니 제발 도와달라고 빌었다. 세계 최강의 군대에 맞선 그들의 무기는 애국심과 서로에 대한 믿음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 온갖 역경들을 헤쳐 나갔다. 승리의 날 레러이는 93명의 문무관을 개국공신으로 포상하면서, 첫발을 함께 내딘 이들을 가장 높은 반열에 올렸다. 전략가 응우옌짜이와 명의 마지막 증원군 유승을 격파한 레쌋, 남부지역을 평정한 쩐응우옌한, 서북지역의 명 세력을 일소한 팜반싸오, 목성의 5만 대군을 패퇴시킨 찡카 등이 개국최고공신으로 임명돼 레러이와 함께 새 나라를 이끌었다. 그러나 평화 속에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의 운명은 비극으로 변해갔다. 최고공신들 ..
2021.08.08 -
레러이 황제가 되다
명나라 식민세력을 베트남에서 몰아냈지만, 국제질서의 재정립과 피폐해진 국토의 부흥에는 그 뒤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레러이는 1428년 4월 스스로 황위에 올라 국호를 다이비엣(大越) 연호를 투언티엔(順天)으로 정했다. 레러이가 세운 왕조는 500년 전 레호안이 세웠던 레(黎)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후레(後黎)왕조라고 부른다. 레러이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베트남의 왕으로 책봉해달라고 요청했다. 명은 이를 거부하고, 쩐왕조를 복원시키라며 쩐까오를 안남국왕으로 지명한 뒤 사신까지 보내 축하했다. 쩐까오는 레러이가 한 해 전 평화회담을 위해 급히 옹립한 허수아비 왕이었다. 불쌍한 쩐까오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음을 알고 달아나다 레러이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독약을 마셨다. 베트남에 큰소리는 쳤..
2021.08.04 -
대명 4차 봉기 3) 탕롱으로 가자
베트남 중부와 남부를 석권한 레러이는 그 뒤 일 년 동안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그 사이 명나라 베이징에서는 홍희제가 즉위 1년도 안 돼 죽고 아들 선덕제가 즉위했다. 선덕제는 베트남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곳 백성들에게 유화정책을 펴도록 지시했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레러이는 1426년 9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마지막 목표인 탕롱(지금의 하노이)을 향해 출정했다. 그는 만여 명의 병사들을 셋으로 나누어 진격했다. 팜반싸오와 찐카, 유명한 산적 출신인 도비 그리고 검술의 달인 리찌엔 장군이 이끄는 3천 명은 선봉대가 되어 서북 내륙을 거쳐 탕롱을 향해 갔다. 공포의 루년추와 현명한 부이부, 레쯔엉, 레보이 장군 등이 이끄는 우군(右軍) 4천 명은 홍강 하류를 장악해 응에안과 하띤에서 철..
2021.07.25 -
대명 2차 봉기 2) “레러이가 살아있다”
명나라군은 레러이를 처형해 봉기를 완전 진압했다고 믿고 각자의 주둔지로 철수했다. 그리고 레러이도 정적에 쌓인 람선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패배였지만 레러이는 단념하지 않았다. 진지를 보수하고 식량을 구하고 병사들을 다시 모았다. 대지주의 아들로 지역 유력 가문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이 그의 재기를 도왔다. 람선 봉기군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갔다. 명나라가 몇 번이나 람선의 저항을 멸절시킬 기회를 놓쳤던 것은 레러이의 인내심과 베트남 백성들의 싸우겠다는 의지뿐 아니라, 명 관료들의 경직된 사고에도 큰 원인이 있었다. 탕롱의 식민정부는 한정된 군사력으로 다수의 원주민을 제압하기 위해 큰 도시에 대부분의 병력을 주둔시켜 방어의 이점을 얻고 반란이 일어나면 병력을 모아 일거에 진압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 거점..
2021.07.20 -
대명 2차 봉기 1) 숭고한 희생
람선 봉기군은 빠르게 세력을 회복했다. 레러이는 새로 모인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성을 쌓고, 기동전에 대비해 곳곳에 식량을 숨겨두었다. 그는 위축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백성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과감한 군사 작전을 계획했다. 이번에는 람선 동쪽 명나라군 주둔지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당시 명 원정군은 탕롱 등 홍강 유역에 주로 배치됐고, 중부와 남부의 다수 지역은 귀순한 베트남 군벌들에게 수비를 맡기었다. 이른바 지방군이었는데, 명에서 온 중국인 부대에 비해서는 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레러이가 노린 약한 고리였다. 레러이는 병사들을 므엉못 산 입구에 매복시키고 명나라군을 유인하기로 했다. 소수의 람선 병사들이 명나라군 기지를 공격하다 후퇴하자, 아니나 다를까 적 병사들이..
2021.07.19 -
대명 1차 봉기 2) 게릴라전의 창시자
명나라의 반응은 빨랐다. 레러이의 봉기 일주일 만에 타잉화 주둔군이 진압을 위해 몰려왔다. 람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병력과 무장과 훈련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봉기군이 패해 쫓기는 처지가 됐다. 베트남 사서는 봉기군이 락투이에서 험한 지형을 이용해 매복해 있다 추격해 온 적을 기습해 대승을 거두었다고 기록했다. 명나라군은 병력을 보강받아 재차 공격해왔다. 봉기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고, 레러이의 부인과 자식들까지 사로잡혔다. 레러이와 봉기군 지도자들은 명나라군의 진격을 막아가며 부근 치링산으로 겨우 퇴각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밀림은 나무가 모두 활엽수라는 점 말고는 겉모습이 우리나라 숲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밀림 안으로 들어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강렬한 열대의 햇볕 덕분에 바닥에 관목이 ..
2021.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