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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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교체 3) 명나라의 첫 패배, 무순 전투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군은 1618년 4월 15일 무순성을 포위했다. 성 아래 새까맣게 모여둔 후금군을 보고 겁이 난 무순성 성주 이영방은 얼른 항복했다. 무혈 입성한 누르하치는 성안에 있던 명나라 상인 10여 명을 풀어줬다. 그는 상인들에게 여비까지 챙겨주며 고향에 돌아가 후금의 ‘칠대한’ 문서를 퍼뜨리라고 말했다. 사실 시키지 않더라도 상인들이 돌아가면 이 엄청난 난리에 대해 떠들텐데, 칠대한 문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금이 악당이라 전쟁이 난 게 아니라 명나라 조정의 박해 때문이라는 선전전의 일환이었다. 누르하치는 무순 성벽을 무너뜨린 뒤 주민들을 모두 포로로 끌고 갔다. 인구가 부족한 후금에게 땅보다는 사람이 더 귀한 자원이었다. 며칠 뒤 총병 장승음이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그러..
2021.08.21 -
쩐왕조의 비극적 종말
참파와의 전쟁은 끝났지만, 왕조를 지키려는 자와 바꾸려는 자들의 싸움은 이제 정점을 향해 치달았다. 레뀌리는 태상황 예종(藝宗)을 부추겨 정적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거나 암살하거나 자결을 강요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제거해갔다. 판단력을 잃고 휘둘리던 예종이 그나마 사망하자 레뀌리는 더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레뀌리는 임금인 순종(順宗)을 겁박해 1397년 수도를 탕롱에서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타잉화로 옮겼다. 그리고 천도 다음해 순종에게 이제 겨우 세 살인 태자를 왕위에 올리고 태상황으로 물러나도록 강요했다. 순종은 모든 요구에 순순히 따르며 목숨만이라도 부지하려 했지만, 이제 새 왕조를 꿈꾸는 레뀌리는 권력에 위협이 될 작은 가능성마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퇴위한 뒤 도교사원에 들어가 있던 순종은 레..
2021.07.11 -
망국을 부른 비겁자들
태상황 예종은 전사한 왕의 둘째 아들 쩐히엔을 새 왕으로 즉위시켰다. 쩐히엔 역시 유약한 인물이어서 나라의 권력이 점점 신하들에게 넘어갔다. 쩐히엔은 비자야 전투에서 도망쳐 백의종군하고 있던 도뜨빈을 다시 중용해 군대의 모든 지휘권을 맡겼다. 그리고 참파의 침략에 대비한다며 조상들의 무덤을 파 부장품을 비밀 장소로 옮겼다. 이런 용렬한 지도부가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포 비나수르가 1377년과 1378년 연거푸 탕롱을 공격했을 때 베트남군은 달아나기에 바빴다. 베트남의 수도가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세 번이나 참파군에 점령되는 치욕을 당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포 비나수르가 베트남 공격의 목적을 약탈에서 정복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잇따른 원정의 승리로 참파의 영토는 계속 북쪽으로 넓어졌..
2021.07.10 -
노력하는 왕으로는 부족하다
영원한 것은 없다. 철옹성 같던 쩐 왕조의 통치체제도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이완되어갔다. 오랜 평화 속에 쩐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제5대 명종(明宗) 치세 말기부터 이미 망국의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명종 자신은 백성의 질고를 근심하며 제왕의 도를 지키기 위해 일평생 노력한 왕이었다. 그는 기근이 발생하면 즉시 곳간을 열어 빈민을 구제하고 세금을 감면했다. 강이 범람하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강가에 나가 제방 보강을 지휘하기도 했다. 국경의 안정에 힘을 기울이고 외적이 쳐들어오면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맞서 싸웠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사가들은 명종에게 국가를 이끌어 나갈 장기 비전과 역량이 부족했던 것으로 박하게 평가한다. 겉으로는 번영하는 듯 보였던 왕조가 밑에서 썩어가는 것을 그는 깨닫..
2021.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