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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똣동-쭉동 전투 1) 왕통의 5만 지원군
진지 총병관은 상황의 급박함을 잇따라 베이징에 보고했다. 새로 즉위한 명나라 선덕제는 거듭된 패전에 크게 낙담하면서 북쪽 몽골과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골치 아픈 베트남에서 발을 빼고 싶어 했다. 선덕제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영락제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영락제의 몽골 정벌에 여러 차례 동행했고, 그 영향으로 즉위한 뒤에도 북부전선의 안정에 큰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명의 대신들이 젊은 황제에게 조금만 더 노력하면 베트남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선덕제는 진지를 파직하고 왕통(王通) 장군을 새 총병관으로 임명해 5만 명의 지원군과 함께 베트남에 파견했다. 왕통은 정난지역(靖難之役) 때 전사한 왕진(王眞)의 아들로 일종의 혁명 유자녀였다. 정난지역이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죽고 요절한 태자의..
2021.07.26 -
대명 3차 봉기와 휴전협정
레러이는 적의 공격을 앉아서 기다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타잉화로 이동해 대공세를 준비 중이던 명나라 진지 총병관을 레러이가 선제공격했다. 진지의 대군이 추격해오자 데오옹에서 또 한 번 매복 공격으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명나라 주력군의 전력은 만만치 않았다. 잔인한 진압작전이 계속되면서 람선 봉기군은 서부 산악지대로 밀려 들어가 라오스 국경까지 퇴각해야 했다. 여기서 레러이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라오스 왕은 베트남 독립군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명과 관계가 틀어져 좋을 게 없고, 장차 베트남이 독립해 강국으로 부활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라오스 왕은 레러이를 돕겠다며 병사 2만 명과 코끼리 100여 마리를 보내왔다. 람선 봉기군은 아무런 의심 없..
2021.07.21 -
명나라의 식민지배 2) 후쩐(後陳)왕조의 봉기
오랜 세월 자주권을 누렸던 베트남인들이 명나라의 지배에 순응할 수는 없었다. 명의 원정권 사령관이었던 장보(張輔)가 종전 몇 달 뒤 귀국하자 곧바로 반란이 일어났다. 여러 독립투쟁 세력 가운데 쩐왕조 8대 황제 예종의 아들로 알려진 쩐꾸이(陳頠)가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407년 황제를 자칭해 간정제(簡定帝)라 불리었으며 연호까지 제정했다. 이를 후쩐(後陳)왕조라고 부른다. 쩐꾸이는 그동안 명에 협조해 세력을 유지해왔던 여러 옛 쩐 왕족들의 귀부를 받아 힘을 키운 뒤 응에안 지방에서 탕롱을 향해 진격했다. 쩐꾸이의 군대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과 관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와 뒤를 따랐다고 기록돼 있다. 놀란 명 조정은 운남성에 주둔하고 있던 목성(沐晟)에게 예하 병력 4만 명을 이끌고 가 탕롱의 명나라..
2021.07.16 -
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6) 대역사의 완성
이제는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우기는 바짝바짝 다가오고, 곳곳에서 베트남군의 습격으로 전사자들이 늘어났다. 몽골군 장군들은 토곤에게 이대로 베트남에 머물다가는 참사를 겪을 것이라고 계속 진언했다. 토곤은 눈앞의 암담한 현실과 이대로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맞닥뜨릴 가혹한 책임추궁 사이에서 갈등했다. 1288년 여름, 토곤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그는 “베트남은 너무 덥고 습하며 군대는 지쳤다”면서 철군을 선언했다. 몽골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육로로는 랑썬을 향해 그리고 해로로는 바익당 강을 통해 퇴각하기로 했다. 육로로 철수하는 부대는 토곤이, 해로 쪽은 오마르가 지휘했다. 베트남은 몽골군을 순순히 돌려보내지 않았다. 쩐꾸옥뚜언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사위인 팜응우라오 장군에게 북쪽 국경 쪽에 매복해 몽골..
2021.06.30 -
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5) 운명의 하롱베이해전
토곤의 절박한 지원 요청을 받은 아버지 쿠빌라이는 번돈해전에서 무사히 돌아온 일부 수송선에다 급히 식량과 배들을 보충해 새로운 선단을 구성했다. 이번에는 오마르의 전투함대를 중국 해남성(하이난)까지 불러 장문호의 수송선단을 호위해 함께 출발하도록 했다. 조심스럽게 베트남 북부해안을 따라 내려온 몽골군의 연합함대가 바익당 강 어귀를 20여km 남겨놓은 꾸아룩 해협 입구를 지날 무렵 기다리던 베트남 수군과 맞닥뜨렸다. 이곳은 오늘날 하롱베이 관광의 중심지인 하롱시 앞바다로 수많은 섬과 바위가 산재해있어 전함들이 은신해 있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지옥을 옮겨놓은 것 같은 대전투가 벌어졌고, 베트남이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오마르 함대가 전함의 숫자나 크기 · 장비 면에서 모두 우위에 있었는데 왜 패했으며 전..
2021.06.29 -
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4) 전투에는 이겼지만
몽골군 수송선단이 궤멸됐지만 아직 전투력이 훼손된 것은 아니었다. 토곤은 서두르면 전쟁에 이길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독려했다. 토곤은 먼저 원정군의 베이스캠프 격이 반끼엡 주변의 점령지를 확대했다. 인근 요새들을 차지해 반끼엡으로 연결되는 세 개의 도로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고, 불과 얼마 전까지 쩐꾸옥뚜언이 주둔했던 마오라 항구도 장악했다. 2차 침입 때 쩐꾸옥뚜언이 기습 상륙전으로 반끼엡을 공격하고 그 뒤 베트남 군민의 게릴라 공격으로 몽골군의 보급선이 분절되었던 아픈 경험 때문이었다. 반끼엡에는 견고한 방벽을 둘러 세우도록 했다. 그리고 토곤은 탕롱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오구치의 무시무시한 돌격대가 육로로, 오마르의 수군이 홍강을 건너 탕롱성을 양쪽에서 공략했다. 베트남 인종은 다시 수도를 버..
2021.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