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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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2) 유능하고 부패한 장수
풍전등화 같던 베트남의 전황은 이번에는 해전에서 실마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독특한 장군 한 명을 만나게 된다. 쩐카인즈(陳慶余)는 베트남 동쪽 변방인 년후에에서 하급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잘것없던 지위의 그는 1차 대몽항전 때 북부전선의 몽골군 추격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성종의 눈에 들어 왕족으로 입양됐다. 고위장교 후보가 된 것이다. 쩐카인즈는 이어 산악부족들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며 군내 서열을 높여갔다. 군 지휘관으로서 쩐카인즈는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쩐카인즈는 탐욕스럽고 온갖 비행을 서슴지 않는 부도덕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여색까지 밝혔는데 그만 최고 권력자 중 한 사람인 쩐꾸옥뚜언의 며느리와 불륜을 저질렀다. 엄한 도덕론자였던 쩐꾸옥뚜언은 인간 ..
2021.06.25 -
피가 강을 이룬 왕조교체
쩐투도는 신속하고 무자비한 방법으로 왕위 찬탈을 성공시키며 가문 내 영향력을 키워갔다. 그는 8살 난 조카 쩐까잉(陳煚)을 궁궐에 들여보내 여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도록 했다. 장차 왕으로 세울 후보로 명목상 가문의 수장이었던 쩐트아의 둘째 아들을 선택하고 자신이 직접 왕위를 욕심내지는 않았다. 쩐씨 일족의 단합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권력은 군대를 장악한 자에게 있는 것이니 자리의 이름에 크게 연연할 바도 아니었다. 쩐투도는 어느 날 두 사람이 공놀이를 하다 여왕이 쩐까잉에게 공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베트남 풍속에 여자가 남자에게 물건을 던지는 것은 청혼을 의미한다고 억지를 부려 둘을 결혼시킨 뒤 곧바로 남편에게 왕위를 넘기도록 했다. 1225년의 일이다. 200여 년을 지속해온 베트남 최초의 장..
2021.06.07 -
서툴렀던 응오(吳) 왕조
해방의 환희가 잦아든 뒤 찾아온 베트남의 현실은 꿈꾸어왔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응오꾸엔은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새로운 율령들을 잇달아 공포했다. 그러나 문무관직과 각종 의식, 관리들의 복제까지 중국 것을 거의 모방하다시피 했다. 정치적 예속은 극복했지만 스스로 통치체제를 정립할 역량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불완전한 국가 통합과 이로 인한 혼란이었다. 중국의 분열을 틈타 베트남 각지에서 세력을 키워온 군벌들은 어제까지 동료 장군이었던 응오꾸엔에게 존경심을 보일지언정 왕조에 충성하는 것에는 주저했다. 군벌들은 응오 왕조가 수립된 뒤에도 각자의 군사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왕권을 위협했다. 비엣족 거주지 밖의 소수민족들은 사실상 독립 상태로 중앙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못했다. 불과 ..
2021.05.21 -
이례적인 짧은 기록
쯩짝의 반란은 전력과 조직, 지도력 등이 매우 열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간에 전국을 평정할 수 있었던 것은 소수의 중국인 관리들만 파견하고 하위 행정단위는 자치에 맡기는 느슨한 지배형태에도 원인이 있었다. 이에 따라 마원은 반란을 완전히 진압한 뒤 베트남의 전통체제를 뿌리째 파괴하고 여기에 한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이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락장과 락후를 폐지하고 군현제도를 강화했다. 현의 수장에는 중국인들을 앉히고 일부 지역에만 소수의 친한(親漢) 베트남인들을 임명했다. 중국인 관리들이 상주하는 곳에는 성채를 쌓고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를 위해 둔전을 만들어 휘하에 있던 병사들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락장 가족 수백 세대를 중국 남부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로써 베트남의 토착지배계급은 세력을..
2021.05.15 -
독립의 꿈은 홍강에 떨어지고
쯩짝과 그녀의 참모들은 교착 상태를 타개할 방법을 숙고했다. 그러나 이미 견고하게 다져진 한나라군의 방어망을 뚫어낼 묘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까운 시간만 자꾸 흘러갔다. 사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쯩짝의 군대가 개전 초 국경에서부터 한나라군의 배후를 공격해 보급로를 끊고, 예상하지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기습하고, 그래도 패하면 물러나며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우기가 되면 분산된 적을 공격해 이동을 강요하고, 낯선 지형에 고립시켜 섬멸하는 전술을 사용했으면 이길 수도 있었다. 다만 이런 베트남의 유격전과 전격전 청야전술은 그 후 오랜 세월 수많은 피를 대지에 뿌리며 체득한 것이지, 그 이전의 인물이자 실전 경험조차 없는 쯩짝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쯩짝의 군대와 마원의 ..
2021.05.14 -
여성 지도자 쯩짝의 반란
베트남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기후와 풍습이 낯설어 관리들이 오기를 꺼렸다. 따라서 파견되는 관리들의 질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권세가에게 뇌물을 줘 자리를 얻고는 백성들을 착취해 그 몇 배로 주머니가 채워지면 다시 근무지를 바꿔 달라고 청탁했다. 중국인들이 주로 빼앗아간 물품은 금, 은, 동, 진주, 루비, 상아, 코뿔소 뿔, 거북이 등껍질, 생강, 계피 등이었다. 이런 특산물을 생산하는 지역의 주민들은 채취한 물건을 식량과 교환해야 살 수 있는데 중국인 관리가 세금을 명목으로 모두 가져가 아사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관리들의 악정과 착취는 반감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한나라의 지배에 대한 반란으로 폭발했다. 쯩짝(微側)은 하노이 서북쪽에 있는 메링현 락장의 딸이었다. 쯩짝과 여동생 쯩니 공..
2021.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