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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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남북조 시대
찡끼엠 사후 아들들의 권력투쟁을 틈타 막왕조가 침략해 왔을 때 응우옌황은 이를 격퇴하는 데 일조했다. 20년 뒤 찡뚱이 북진해 막왕조를 무너뜨린 뒤에는 탕롱으로 불려가 막왕조 잔당들을 소탕하는 데 동원됐다. 응우옌황은 묵묵히 소임을 다했지만 찡뚱은 자신의 휘하에 들어온 의심스러운 외삼촌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8년의 세월을 보낸 응우옌황은 중부 해안인 닌빈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겠다며 탕롱을 떠나 그대로 배를 타고 후에로 돌아갔다. 탕롱을 벗어나기 전 응우옌황은 찡뚱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과 손자까지 인질로 남겨두어야 했다. 또한 응우옌황의 딸을 찡뚱의 아들 찡짱에게 출가시켜 몇 겹의 친족관계를 맺었다. 서로를 의심하고 경쟁했지만 응우옌황과 찡뚱 때까지는 그래도 친척이라는 의..
2021.08.18 -
찡 쭈어 무신정권
베트남의 새 지배자 찡뚱(鄭松)은 황제에게 깍듯이 대했다. 막왕조를 격멸한 다음 해 그는 세종(世宗)을 탕롱으로 모셔와 화려한 승전 의식을 거행했다. 당시 기록은 “제왕께서 탕롱의 정전에 들어가 제위에 오르자 모든 관리들이 축하 인사를 올렸다”라고 이 장면을 묘사했다. 찡뚱은 자신의 승리를 ‘반역자 막씨 일족을 몰아내고 후레왕조가 복원된 것’으로 선전한 것이다. 그러나 찡뚱은 후레왕조 황제에게 손톱만큼의 권력도 나눠주지 않았다. 황제는 그저 의례적인 지위에 불과했다. 찡뚱은 스스로 도원사총국정상부평안왕(都元師總國政尙父平安王)이라는 긴 직함을 붙인 뒤 왕부(王府)를 세워 관리들을 두고 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자신을 쭈어(主)라고 칭해 무신정권인 찡 쭈어(鄭主) 시대를 열었다. 무기력하게 굴복했던 세종(世..
2021.08.17 -
정보 수집에 미숙했던 황제의 치욕
명나라의 베트남 정벌 논쟁이 막 사그라들 무렵 갑자기 막당중이 사신을 보내 투항하고 토지와 호구를 기록해 명의 처분을 따르겠다고 밝혀왔다. 명으로서는 기대도 안 했던 막당중의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앞이 캄캄한 원정의 부담에서 벗어나면서도 실리도 챙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명나라 관리 모백온은 광서성으로 내려가 막당중에게 귀순하면 죄를 용서하겠다는 격문을 보냈다. 막당중은 관리들을 데리고 국경인 진남관(鎭南關)에 도착했다. 그리고 죄인처럼 머리를 풀고 목에 줄을 맨 뒤 맨발로 기어가 단상에 머리를 찧으며 항복의 표(表)를 올렸다. 막당중은 토지와 인구 대장을 바치고 국경 5개 지역을 할양하며 영원히 신복하겠다고 청하였다. 모백온은 막당중의 죄를 사면하고, 돌아가 황제의 명을 기다리도록 했다. 모백온의 상..
2021.08.15 -
명나라의 베트남 정벌 소동
막왕조에 맞서 후레왕조를 복원시키려는 반란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응우옌낌(阮金)이 저항세력들을 규합해 베트남을 남북조 형세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막당중의 왕위 찬탈 때 라오스로 몸을 피했던 응우옌낌은 라오스 왕의 지원 아래 망명자들을 모아 후레왕조의 발원지인 타잉화로 돌아왔다. 그리고 비운의 황제 소종(昭宗)의 장남을 찾아내 새 황제로 추대함으로써 후레왕조 유신들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래도 군사력의 열세를 느낀 응우옌낌은 명나라의 도움을 얻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막왕조 군사들의 눈을 피해 천신만고 끝에 3년 뒤 베이징에 도착한 사신단은 막당중의 왕위 찬탈을 알리고 토벌을 요청했다. 이미 명나라 조정은 베트남의 정변을 파악하고 내전에 개입할지 여부에 대해 대논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
2021.08.14 -
그곳에 가니) 후레왕조의 람낀(藍京)
명나라군을 축출하고 베트남 황제의 자리에 오른 레러이는 고향 람선을 방문해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자주독립 정신을 기리고 왕조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람선 마을의 추강(朱江) 북쪽에 사찰을 세운 뒤 그 일대를 람낀(藍京) 즉 ‘푸른 도읍’이라 이름 지었다. 레러이가 사망하자 후손들은 그가 사랑했던 고향으로 옮겨와 묻었고, 그 뒤 람낀은 후레왕조 역대 왕들의 영원한 휴식처가 되었다. 람낀에 왕릉과 사당들이 세워지고, 왕이 해마다 방문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머물 수 있도록 행궁이 건설됐다. 그리고 왕의 거처를 지킬 성벽과 그 외곽의 해자가 들어서면서 람낀을 문자 그대로 작은 도읍의 모습을 갖췄다. 후레왕조가 몰락하면서 람낀의 궁전과 사찰 사당들은 폐허가 됐다. 왕릉도 태조 레러이 등 다섯 황제 ..
2021.08.09 -
후레왕조 황금시대
성종은 안정된 내치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외 원정에 나섰다. 이는 성종 즉위 후 기대와는 달리 점점 권력에서 멀어진 무신들의 불만을 해소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대규모 전쟁은 자신이 직접 지휘해 승전의 영광이 정치적 불안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았다. 남쪽의 참파는 명나라의 지원을 기대하며 베트남 후레왕조 혼란기에 조공을 끊었다. 성종 치하에 다시 강성해진 베트남이 조공 재개를 요구하며 양국에 긴장이 높아졌다. 참파 왕은 일단 신복을 받아들였지만, 지나친 조공 요구와 병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고민 끝에 10만의 군대로 베트남에 선제공격했다. 이에 성종은 치밀한 반격을 준비했다. 성종은 그때까지의 인력과 물자 쟁탈전에서 더 나아가 참파의 수도 비자야를 영구 점령해 자국 영토로 편입시킬 생각을 했다. 그..
2021.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