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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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 4차 봉기 3) 탕롱으로 가자
베트남 중부와 남부를 석권한 레러이는 그 뒤 일 년 동안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그 사이 명나라 베이징에서는 홍희제가 즉위 1년도 안 돼 죽고 아들 선덕제가 즉위했다. 선덕제는 베트남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곳 백성들에게 유화정책을 펴도록 지시했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레러이는 1426년 9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마지막 목표인 탕롱(지금의 하노이)을 향해 출정했다. 그는 만여 명의 병사들을 셋으로 나누어 진격했다. 팜반싸오와 찐카, 유명한 산적 출신인 도비 그리고 검술의 달인 리찌엔 장군이 이끄는 3천 명은 선봉대가 되어 서북 내륙을 거쳐 탕롱을 향해 갔다. 공포의 루년추와 현명한 부이부, 레쯔엉, 레보이 장군 등이 이끄는 우군(右軍) 4천 명은 홍강 하류를 장악해 응에안과 하띤에서 철..
2021.07.25 -
대명 4차 봉기 2) 승기를 잡다
명나라 조정은 베트남의 실망스러운 전황을 보고 받고 진지 총병관을 강하게 질책했다. 몇 달 내 람선의 불온세력을 섬멸하지 못하면 직책을 박탈하겠다고 경고했다. 진지는 급히 군대를 정비하고 짜롱 수복전을 준비했다. 레러이는 진지와의 결전을 앞두고 딘리엣 장군에게 병사 2천 명을 주어 남쪽의 하띤 성(省)을 공격하도록 했다. 레러이로부터 싸워 이기는 법을 배운 휘하 장군들이 이때부터 전장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딘리엣이 이끄는 람선 봉기군이 남하하자 이 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반군들이 속속 달려와 합류했다. 덕분에 람선 봉기군은 코끼리부대와 전투함대까지 갖추게 되었다. 수세에 몰린 명나라군은 하띤 성도(省都)에 틀어박혀 방어에 급급할 뿐 북쪽 응에안의 진지 총병관을 지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2021.07.24 -
대명 1차 봉기 2) 게릴라전의 창시자
명나라의 반응은 빨랐다. 레러이의 봉기 일주일 만에 타잉화 주둔군이 진압을 위해 몰려왔다. 람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병력과 무장과 훈련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봉기군이 패해 쫓기는 처지가 됐다. 베트남 사서는 봉기군이 락투이에서 험한 지형을 이용해 매복해 있다 추격해 온 적을 기습해 대승을 거두었다고 기록했다. 명나라군은 병력을 보강받아 재차 공격해왔다. 봉기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고, 레러이의 부인과 자식들까지 사로잡혔다. 레러이와 봉기군 지도자들은 명나라군의 진격을 막아가며 부근 치링산으로 겨우 퇴각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밀림은 나무가 모두 활엽수라는 점 말고는 겉모습이 우리나라 숲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밀림 안으로 들어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강렬한 열대의 햇볕 덕분에 바닥에 관목이 ..
2021.07.18 -
살아남은 자
레러이는 지금의 베트남 중북부 타잉화(탄호아)성 람선 지방에서 대지주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 큰 부를 이뤄 머슴만 천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유복한 집안에서 활달하게 자란 레러이는 야심 많고 호방하며 벗들을 좋아하는 풍운아로 성장했다. 그의 성격으로 볼 때 만약 평화 시기였다면 평판 나쁜 젊은이들을 끌고 다니는 부잣집 아들로 그쳤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절박한 시대의 요구가 그를 영웅의 길로 이끌었다. 쩐꾸이 황제가 침략자 명나라에 맞서 봉기하자 피 끓는 청년 레러이는 주저 없이 가담했고 이내 반란군 장군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수년간의 투쟁이 무위로 끝나고 반란이 진압 당하자 그는 조용히 고향 람선으로 돌아왔다. 반란군 수뇌부였음에도 레러이는 목숨을 보전했음은 ..
2021.07.17 -
명나라의 식민지배 1) 수탈과 문화파괴
쩐왕조 복원이라는 명나라의 개전 명분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베트남인들을 위무하기 위해 3년간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주겠다고 선포했지만 호왕조의 잔여 세력이 소멸하자 이 역시 흐지부지됐다. 그리고 중국에서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관리들이 떼 지어 오면서 본격적인 수탈이 시작됐다. 애당초 명나라 군대가 좋은 일을 하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명의 식민정부는 반란을 우려해 베트남인들이 무기를 제조하거나 소지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고 저항의 수단이 제거된 베트남인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병합 1년도 안 돼 베트남에서 거둬들인 세금이 우마 24만 마리, 벼 1360만 석, 배 8670척 등이었다. 가난한 산악국가였던 중세 베트남의 경제를 거의 거덜 내다시피 한 것이다. 16세부터 60세까지 모든 남자는 군역과 부역..
2021.07.15 -
그곳에 가면) 호왕조의 수도
호뀌리는 이곳에서 수많은 피를 뿌린 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호뀌리는 임금인 순종(順宗)을 끌고 타잉화로 가 새 수도를 세우고 서도(西都)라고 이름 붙였다. 지금의 타잉화성 빈록현이다. 하노이시에서 남쪽으로 150km 그리고 타잉화시에서는 북서쪽으로 45km 떨어져 있다. 서도 주변은 옛 왕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시골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면 들판 한 가운데 웅장한 성의 유적이 나타난다. 돌로 만든 동서남북 네 개의 성문과 성벽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다. 성채는 남북으로 870m 동서로 883m의 거의 정사각형 모형이며, 정문이라 할 수 있는 남문이 높이 9.5m 폭 15m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웅장한 크기이다. 동남아시아에 현존하는 유일한 석조 성채이며, 독창적인 건축술로 ..
2021.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