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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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7) 전쟁 이후
육로로 퇴각하던 몽골군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베트남군의 매복 공격에 시달리던 토곤은 병력을 소규모로 산개해 후퇴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유목민족 군대의 특기로 농경민족을 침략할 때 정규군과의 교전을 피하고 싶으면 수십 명 단위로 흩어져 지나친 뒤 순식간에 다시 집결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 전술은 소규모 부대가 마주치는 현지 주민들이 싸울 능력과 의지가 없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몽골 병사들 앞에는 결사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베트남 농민들이 있었다. 2차 대몽항전이 끝나고 몽골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호의를 침략과 학살로 되돌려 받은 베트남인들은 몽골 패잔병을 살려 보내지 말아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결국 몽골 육군 중 살아서 국경을 넘어간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토곤은 겨우 목숨을 건져 귀국했..
2021.07.02 -
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6) 대역사의 완성
이제는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우기는 바짝바짝 다가오고, 곳곳에서 베트남군의 습격으로 전사자들이 늘어났다. 몽골군 장군들은 토곤에게 이대로 베트남에 머물다가는 참사를 겪을 것이라고 계속 진언했다. 토곤은 눈앞의 암담한 현실과 이대로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맞닥뜨릴 가혹한 책임추궁 사이에서 갈등했다. 1288년 여름, 토곤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그는 “베트남은 너무 덥고 습하며 군대는 지쳤다”면서 철군을 선언했다. 몽골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육로로는 랑썬을 향해 그리고 해로로는 바익당 강을 통해 퇴각하기로 했다. 육로로 철수하는 부대는 토곤이, 해로 쪽은 오마르가 지휘했다. 베트남은 몽골군을 순순히 돌려보내지 않았다. 쩐꾸옥뚜언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사위인 팜응우라오 장군에게 북쪽 국경 쪽에 매복해 몽골..
2021.06.30 -
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5) 운명의 하롱베이해전
토곤의 절박한 지원 요청을 받은 아버지 쿠빌라이는 번돈해전에서 무사히 돌아온 일부 수송선에다 급히 식량과 배들을 보충해 새로운 선단을 구성했다. 이번에는 오마르의 전투함대를 중국 해남성(하이난)까지 불러 장문호의 수송선단을 호위해 함께 출발하도록 했다. 조심스럽게 베트남 북부해안을 따라 내려온 몽골군의 연합함대가 바익당 강 어귀를 20여km 남겨놓은 꾸아룩 해협 입구를 지날 무렵 기다리던 베트남 수군과 맞닥뜨렸다. 이곳은 오늘날 하롱베이 관광의 중심지인 하롱시 앞바다로 수많은 섬과 바위가 산재해있어 전함들이 은신해 있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지옥을 옮겨놓은 것 같은 대전투가 벌어졌고, 베트남이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오마르 함대가 전함의 숫자나 크기 · 장비 면에서 모두 우위에 있었는데 왜 패했으며 전..
2021.06.29 -
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2) 유능하고 부패한 장수
풍전등화 같던 베트남의 전황은 이번에는 해전에서 실마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독특한 장군 한 명을 만나게 된다. 쩐카인즈(陳慶余)는 베트남 동쪽 변방인 년후에에서 하급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잘것없던 지위의 그는 1차 대몽항전 때 북부전선의 몽골군 추격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성종의 눈에 들어 왕족으로 입양됐다. 고위장교 후보가 된 것이다. 쩐카인즈는 이어 산악부족들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며 군내 서열을 높여갔다. 군 지휘관으로서 쩐카인즈는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쩐카인즈는 탐욕스럽고 온갖 비행을 서슴지 않는 부도덕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여색까지 밝혔는데 그만 최고 권력자 중 한 사람인 쩐꾸옥뚜언의 며느리와 불륜을 저질렀다. 엄한 도덕론자였던 쩐꾸옥뚜언은 인간 ..
2021.06.25 -
몽골제국의 수치
2차 베트남 침략 실패는 몽골제국 전체에 큰 충격을 안겼다.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면서 이처럼 작은 나라에게 두 차례나 무참하게 패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연이은 패전으로 인한 인적 물적 손실은 원나라가 일본 원정을 중단해야 할 정도로 막대했다. 원나라의 1차 베트남 침략이 실패한 직후인 1260년 지금의 팔레스타인 갈릴리에서 일한국의 몽골군이 이집트의 노예전사 집단인 맘루크 부대와 격돌해 참패했다. 이를 전장에 흐르던 시냇물의 이름을 따 아인잘루트 전투라고 부르는데, 이로써 몽골의 시리아와 이집트 정복이 좌절됨은 물론 서진 자체가 멈췄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러나 아인잘루트 전투는 몽골군 병력이 1만 명밖에 안 됐다는 점에서 베트남 · 몽골 전쟁과는 규모를 비교할 수 없었다. 이집트군의 병력은 몽골군..
2021.06.23 -
몽골의 2차 베트남 침략 (4) 물러가는 적들
수세에 몰린 몽골군은 몇몇 성들에 틀어박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보급선이 끊어진데다 베트남의 청야전술로 어디서도 쌀 한 톨 구할 수 없었던 몽골 병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우기가 계속되면서 진중에 전염병도 퍼졌다. 토곤이 1차 침략의 실패 원인을 분석해 원정군에 중국 의사들을 대거 동행시켰지만 근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토곤은 결국 철군을 결심했다. 몽골군은 중국 광서성과 운남성의 본래 주둔지를 향해 북동쪽과 북서쪽 두 갈래로 나뉘어 빠르게 퇴각했다. 토곤 자신은 킵차크 출신 시도르가 이끄는 수군의 배를 타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육로로 이동한 대부분의 부대는 베트남군의 격렬한 반격에 시달렸다. 쩐꾸옥뚜언은 홍강 북쪽에 5만 명의 병력을 보내 몽골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반끼엡, 노이방..
2021.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