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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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2차 베트남 침략 (3) 마침내 대반격
몽골군은 병력을 대폭 보강한 소게투가 닌빈까지 진출해 있었고, 그곳에서 탕롱 사이에 여러 주둔지들이 홍강을 따라 포진해 있었다. 토곤은 베트남 왕이 타잉화에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고 소게투에게 남쪽으로 군대를 돌려 잔여 세력을 일소하라고 지시했다. 오마르에게도 군함 60척을 이끌고 가 소게투를 돕도록 조치했다. 그런데 재편성을 마친 베트남군이 이들을 피해 배를 타고 홍강을 거슬러 오르며 강 유역의 몽골 주둔지들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쩐꾸옥뚜언은 홍강 하구에서 탕롱 중간에 있는 흥옌의 몽골군 요새를 공격해 점령했다. 깜짝 놀란 토곤이 직접 군대를 끌고 내려왔다. 이때 베트남에 계절이 바뀌어 쩐꾸옥뚜언이 그토록 기다리던 우기가 시작되었다. 장대비가 되었다 보슬비가 되었다를 반복하며 끈질기게 내리는 비로 홍강 ..
2021.06.21 -
몽골의 2차 베트남 침략 (2) 피로써 시간을 벌다
암울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자원입대가 줄을 이어 베트남군은 단기간에 25만 대병력을 다시 편성할 수 있었다. 이를 기초로 쩐꾸옥뚜언은 전세의 반전을 시도했다. 쩐꾸옥뚜언와 그의 사위 팜응우라오 장군은 수백 척의 배에 병사들을 태워 은밀히 강을 건넌 뒤 반끼엡에 있는 몽골군 보급기지를 기습했다. 토곤은 베트남을 공격하면서 1차 침입 실패의 원인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중국 국경에서 최전선까지 15km마다 식량 보급기지를 세웠는데 그 중심지가 반끼엡이었다. 베트남군이 반끼엡의 몽골군 기지를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를 기점으로 몽골군 보급선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총력전이었다. 쩐 왕족의 사병, 향군, 부락민 등 너나없이 여건에 맞춰 몽골군의 창고와 수송부대를 공격했고, 그만한 힘이 없으면 ..
2021.06.20 -
몽골의 2차 베트남 침략 (1) 항복하시려면 신을 베소서
1284년 12월 토곤이 이끄는 몽골 주력군이 국경을 넘었다. 토곤의 육군은 베트남군의 저항을 뚫고 랑썬을 지나 반끼엡까지 진격했고, 그곳에서 바다와 강을 거슬러온 오마르의 수군과 합류했다. 쩐꾸옥두언은 두 부대의 합류를 막아보려 애를 썼지만 실패했고, 토곤과 오마르의 몽골군은 개전 한 달도 안 돼 수도 탕롱을 점령했다. 베트남 인조는 겨우 몸을 피해 작은 배를 타고 홍강을 따라 내려가 남쪽으로 피신했다. 토곤은 탕롱에 입성한 뒤 성에 남아있던 베트남 백성들을 학살하고 큰 잔치를 열어 승리를 자축했다. 중국 운남성에 주둔하던 몽골군도 나시루딘의 지휘에 따라 강줄기를 따라 남하하며 곳곳의 저항을 격파하고 탕롱성에 들어와 토곤 본대와 합류했다. 탕롱에서 퇴각한 베트남군은 남동쪽으로 70km 떨어진 남딘 지방..
2021.06.19 -
죽더라도 싸우겠다
몽골은 참파 침략 도중에 여러 차례 베트남에 사신을 보내 길을 빌려주고 군량을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베트남은 참파가 멸망하면 자신들 역시 버티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식량은 조공 형식으로 제공하겠지만 남진로는 열어줄 수 없다며 거절했다. 1284년 말 중국 각지에서 무려 20만 명의 대병력이 베트남 접경 광서성으로 이동했다. 쿠빌라이의 아들 토곤이 이끌 이 군대에는 몽골족 정예병과 옛 금나라 땅에서 모은 북방민족 병사들, 옛 송나라 땅에서 징집한 조금은 덜 미더운 한족 병사들이 망라돼 있었다. 토곤은 다시 베트남에 참파로 가는 길을 열고 군량을 제공하라고 요구했지만 베트남의 대답은 똑같았다. 전쟁은 임박했고 전력의 열세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흉포한 적의 침략을 앞두고 민심이 흔들리자..
2021.06.19 -
참파를 만만히 보았다가
몽골은 먼저 베트남 남쪽의 참파부터 공격했다. 몽골은 참파에 행중서성(行中書省) 즉 중앙정부기관인 중서성의 출장소를 설치했다. 이는 남해무역을 장악하고 장차 벌어질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병력을 차출하겠다는 의도였다. 베트남을 고립시키고 남북에서 동시에 공격하겠다는 군사적 목적도 있었다. 멀쩡한 남의 나라에 지방관청을 설치했으니 참파가 두 눈을 뜨고 이를 지켜볼 수는 없었다. 인적 물적 수탈은 물론 자칫 국권까지 그대로 넘어갈 판국이었다. 하릿지 태자 등 참파의 강경파들이 몽골 관리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격분한 몽골은 즉시 원정군을 보냈다. 쿠빌라이는 송나라 정복에 공을 세우고 천주 성주로 봉해져 있던 소게투를 차출해 지휘를 맡겼다. 1282년 음력 12월, 350척의 배에 나눠 탄 만여 명의 몽골..
2021.06.18 -
싸우자는 몽골, 피하려는 베트남
송나라가 마침내 무릎을 꿇자 이제 다음 목표는 베트남이었다. 쿠빌라이 대칸이 젊은 시절 대리국을 정복하면서 화려한 군사 경력의 막을 열었기 때문에, 그때 고락을 같이 했던 운남 주둔군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 군대가 베트남에서 겪은 패배를 쿠빌라이는 자신의 치욕으로 여겨 복수하고 싶어 했다. 그런 개인적 이유가 아니더라도 몽골에게는 동남아시아로 정복지를 넓혀 갈 전진기지로서 베트남이 꼭 필요했다. 베트남을 속국으로 만든다면 열대지방의 기후와 지형에 익숙한 현지인들을 용병으로 징발할 수 있고, 바다에 서툰 몽골군의 약점을 베트남 수군으로 보완해 남중국해를 지배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는 몽골에 패할 경우 경제적 수탈에 그치지 않고 전쟁도구로 내몰려 소모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민족의 존망을 걸고 저..
2021.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