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타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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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 대리국을 정복한 몽골
칭기즈칸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다. 몽골의 전통에 따르면 막내아들이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아야 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용맹한 장수였던 막내아들 툴루이 대신 현명한 셋째아들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칭기즈칸 사후 몽골 족장들은 이를 무시하고 전통에 따라 툴루이를 새로운 칸으로 선출했다. 툴루이는 2년간 임시 칸으로 있다가 아버지의 결정을 지키기 위해 형 오고타이에게 제위를 양보했다. 오고타이에 이어 그의 장남 귀위크가 어머니의 도움으로 몽골 제국의 제3대 칸이 되었다. 그는 현명하고 결단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정적인 바투를 굴복시키기 위해 원정길에 올랐다 즉위 2년 만에 병사해 어떤 업적을 남기기에는 치세가 너무 짧았다. 귀위크가 죽자 툴루이의 막내아들 몽케가 칸의 자리에 올랐다..
2021.06.13 -
몽골의 1차 송나라 침략 (1) 경솔함이 부른 국난
금나라를 멸한 직후에는 몽골과 송나라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해도, 세계정복을 향한 몽골의 야심은 언젠가는 송을 침략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송의 섣부른 군사행동이 양국의 충돌을 앞당기고 말았다. 맹공이 금에서 개선하자 송은 축제 분위기였고 내친 김에 화북의 옛 영토를 되찾자는 강경파의 주장이 거세졌다. 특히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의 탈환은 국가적 숙원이었다. 송은 무려 20만 명을 동원해 북진했고, 텅 빈 개봉과 인근의 낙양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송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몽골이 이미 낙양에서 동쪽으로 200km 떨어진 동관에 속속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었다. 송군은 갑작스럽게 출병하느라 군량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현지에서 조달할 생각이었는데, 풍요롭던 개봉 일대가 ..
2021.06.12 -
국제정세를 오판한 금나라의 멸망
몽골의 주력군이 서쪽에 가 있는 사이 금나라가 일시적으로 세력을 회복했다. 금은 완안진화상이 대창원에서 400명의 군사로 몽골군 8,000명을 기습해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하남성과 섬서성 등에서 연승을 거두며 위수 유역 등 점령지 일부를 탈환했다. 그러나 금나라는 정세를 오판하고 송나라를 침공해 두 개의 전선에서 국력을 소진하는 대실책을 저질렀다. 송이 그동안 바쳐오던 세폐를 중단하자 군비에 쪼들리던 금 조정이 “금군이 몽골은 칠 수 없으나 송군에 이기고도 남을 만하다”며 송의 땅을 공격해 들어간 것이다. (1217년) 송나라는 명장 맹공(孟珙)의 지휘 아래 거듭되는 금의 침략을 모두 막아내고 7년간의 전쟁을 승리로 마감했다. 그러는 사이 서쪽에서 돌아온 몽골이 오고타이 칸의 명령으로 모든 역량을 동원해..
2021.06.11 -
세계를 불태우는 ‘신의 징벌’
통일된 몽골의 최대 목표는 지난 1백 년간 자신들을 핍박해온 금나라의 타도였다. 여기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얻기 위해 몽골은 먼저 중국 서북부에 있던 서하를 공격해 2년 만에 정복했다. (1209년) 서하에 이어 금나라 북쪽 방어를 맡고 있던 거란족 기병들까지 저항 없이 몽골군에 합류했다. 금나라의 군대도 여진족 외에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돼 있었지만, 칭기즈칸의 다민족군이 공동체에 대한 충성과 결속력이 더 강했다.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토록 두려워했던 금나라 군대에 서전에서 승리를 맛본 몽골군은 병력을 몇으로 나누어 황하 이북과 만주 전역을 휩쓸었다. 몽골군은 요새화된 대도시들은 우회한 채 작은 마을들을 하나하나 공략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살해했다. 중원을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로 만든 몽골..
2021.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