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에안(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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똣동 쭉동 전투 4) 고립된 명나라군
타잉화에 머물러 있던 레러이는 승전보 속에 탕롱 인근으로 본진을 옮겼다. 레러이가 탕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자 성 밖에 주둔하고 있던 방정 장군의 마지막 부대마저 수비를 포기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 탕롱성은 외부와 고립되게 되었다. 레러이는 탕롱을 포위하는 한편 인근의 박닌 푸토 남딘 등 크고 작은 성들을 모조리 공격해 점령했다. 베트남의 정치 · 경제 중심지인 홍강 유역 통제권까지 이제 레러이가 장악하게 되었다. 패색이 짙어진 왕통은 레러이에게 협상 의사를 밝혔다. 레러이가 쩐왕조를 복위시키면 철군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당초 명의 베트남 침략 명분이 호뀌리의 왕위 찬탈을 징벌한다는 것이었으니, 쩐왕조를 다시 세우면 명나라군이 물러가도 크게 체면을 깎이지 않을 법도 했다. 레러이는 “전쟁의 고통으로부터 ..
2021.07.29 -
대명 4차 봉기 1) 남쪽을 친다
개전을 앞두고 열린 람선의 지휘관 회의에서 응우옌칙 장군이 남쪽 응에안 성을 치자고 주장했다. 비록 명나라군 주력이 북쪽 탕롱 인근에 몰려 있지만, 람선 봉기군이 장기 투쟁에 필요한 식량과 무기를 얻으려면 응에안 같은 넓은 평야지대를 먼저 장악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응우옌칙은 응에안 성에서 저항군을 이끌다 한계에 부딪치자 부대 전체를 이끌고 레러이에 합류한 인물이었다. 레러이를 비롯한 모두가 응우옌칙 주장에 동의했다. 결과적으로 명나라는 또 한 번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람선 봉기군이 다깡의 명나라군 기지를 급습하며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1424년) 명나라군은 인근 병력을 총동원해 맞섰지만 다깡을 방어하는 데 실패했다. 이 전투로 명나라군도 람선 봉기군의 남하 의도를 눈치챘다. 진지 총병관은 람선..
2021.07.23 -
몽골의 2차 베트남 침략 (1) 항복하시려면 신을 베소서
1284년 12월 토곤이 이끄는 몽골 주력군이 국경을 넘었다. 토곤의 육군은 베트남군의 저항을 뚫고 랑썬을 지나 반끼엡까지 진격했고, 그곳에서 바다와 강을 거슬러온 오마르의 수군과 합류했다. 쩐꾸옥두언은 두 부대의 합류를 막아보려 애를 썼지만 실패했고, 토곤과 오마르의 몽골군은 개전 한 달도 안 돼 수도 탕롱을 점령했다. 베트남 인조는 겨우 몸을 피해 작은 배를 타고 홍강을 따라 내려가 남쪽으로 피신했다. 토곤은 탕롱에 입성한 뒤 성에 남아있던 베트남 백성들을 학살하고 큰 잔치를 열어 승리를 자축했다. 중국 운남성에 주둔하던 몽골군도 나시루딘의 지휘에 따라 강줄기를 따라 남하하며 곳곳의 저항을 격파하고 탕롱성에 들어와 토곤 본대와 합류했다. 탕롱에서 퇴각한 베트남군은 남동쪽으로 70km 떨어진 남딘 지방..
2021.06.19 -
저물어가는 리(李)왕조
낮이 지나면 밤이 찾아오는 법이다. 신종 이후 베트남 리왕조의 왕들이 향락에 빠져 국사를 멀리하면서 나라의 기강이 점차 무너져갔다. 관료들은 부패하고 지방 호족 세력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수탈에 지친 백성들이 농토를 버리고 유랑하다 도적떼가 되었고 이런 혼란을 이용해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고종 때 남부 응에안 성의 한 관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수도권인 흥옌 출신 호족 팜빈지에게 진압을 명령했다. 팜빈지는 자기 고향 주변에서 군사들을 모아 출격해 반란을 평정한 뒤 가담자들의 재기를 막기 위해 모든 재산을 몰수해 불태웠다. 간신히 몸을 피한 관리는 뇌물로 조정 대신들을 매수해 팜빈지가 권력을 남용하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모함했다. 팜빈지의 득세를 우려하던 권신들이 터무니없는 주장에 귀를 기울였고 ..
2021.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