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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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교체 2) 후금 건국과 숨 막히는 압박
구러산 전투의 승리는 만주의 세력 판도를 바꿔놓았다. 여러 부족들이 누르하치를 새로운 강자로 인정했다. 몽골에서도 코르친 부족과 칼카 부족이 복종의 뜻을 전해왔다. 누르하치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인구가 적은 여진족이 명나라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몽골족과 제휴가 반드시 필요했다. 누르하치는 본인뿐 아니라 왕자들에게도 몽골족과 혼인을 적극 권장하여 두 민족의 융합에 노력했다. 누르하치는 해서여진 부족들을 각개격파해나갔다. 그들은 서로 사이가 나빠 단합하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그 틈을 파고들어 공격하거나 내정에 간섭하며 세력을 넓혔다. 해서여진 부족들을 놓고 예허부와 누르하치의 쟁탈전이 벌어졌다. 명나라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예허부의 편을 들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예허부 외에는 해서여진의 모든 부족들이 누르하치..
2021.08.20 -
베트남의 남북조 시대
찡끼엠 사후 아들들의 권력투쟁을 틈타 막왕조가 침략해 왔을 때 응우옌황은 이를 격퇴하는 데 일조했다. 20년 뒤 찡뚱이 북진해 막왕조를 무너뜨린 뒤에는 탕롱으로 불려가 막왕조 잔당들을 소탕하는 데 동원됐다. 응우옌황은 묵묵히 소임을 다했지만 찡뚱은 자신의 휘하에 들어온 의심스러운 외삼촌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8년의 세월을 보낸 응우옌황은 중부 해안인 닌빈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겠다며 탕롱을 떠나 그대로 배를 타고 후에로 돌아갔다. 탕롱을 벗어나기 전 응우옌황은 찡뚱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과 손자까지 인질로 남겨두어야 했다. 또한 응우옌황의 딸을 찡뚱의 아들 찡짱에게 출가시켜 몇 겹의 친족관계를 맺었다. 서로를 의심하고 경쟁했지만 응우옌황과 찡뚱 때까지는 그래도 친척이라는 의..
2021.08.18 -
대명 1차 봉기 1) 작은 출발
독립투쟁에 가담하려는 젊은이들이 늘어나자 레러이는 람선에서 멀지 않은 룽냐이(Lũng Nhai) 산에 지휘부를 마련했다. 평야와 서부 산악지대가 만나고 남쪽으로 추 강이 흘러 유사시 기동에 유리한 곳이었다. 룽냐이 산이 지금의 어디인지에 대해 베트남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다. 가장 유력한 장소 중 하나가 람선에서 서쪽으로 약 5km 떨어진 응옥풍 마을이라는 데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레러이의 독립투쟁 기록에 나오는 대부분의 지명이 현재의 지명과 달라 전쟁의 진행 과정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거병 2년 전 레러이는 동지 18명과 함께 룽냐이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함께 살고 함께 죽으며 조국과 백성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노라” 맹세했다. 그리고 말을 잡아 피를 나누어 마시며 영원히 맹세..
2021.07.17 -
다가오는 전쟁의 먹구름
대내외 정책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 호뀌리는 과거 침략에 대한 복수와 향후 대명 전쟁 시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참파를 공격했다. 참파는 포 비나수르가 죽은 뒤 다시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호뀌리는 즉위한 해에 참파를 공략했다가 실패했지만, 2년 뒤 재정비된 군대를 보내 대승을 거두었다. 참파 국왕은 영토 일부를 떼어주며 강화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세가 오른 호뀌리는 아예 참파를 병합할 목적으로 1403년 20만 대군을 일으켜 침략했다. 베트남군은 수도 비자야를 포위했지만 참파군이 끈질기게 저항하고 한 달 만에 군량이 떨어지자 철수하고 말았다. 망국의 위기에 놓인 참파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청했고, 명이 이를 받아들여 전쟁을 중단하도록 베트남에 중재했다. 베트남의 약세..
2021.07.13 -
싸우자는 몽골, 피하려는 베트남
송나라가 마침내 무릎을 꿇자 이제 다음 목표는 베트남이었다. 쿠빌라이 대칸이 젊은 시절 대리국을 정복하면서 화려한 군사 경력의 막을 열었기 때문에, 그때 고락을 같이 했던 운남 주둔군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 군대가 베트남에서 겪은 패배를 쿠빌라이는 자신의 치욕으로 여겨 복수하고 싶어 했다. 그런 개인적 이유가 아니더라도 몽골에게는 동남아시아로 정복지를 넓혀 갈 전진기지로서 베트남이 꼭 필요했다. 베트남을 속국으로 만든다면 열대지방의 기후와 지형에 익숙한 현지인들을 용병으로 징발할 수 있고, 바다에 서툰 몽골군의 약점을 베트남 수군으로 보완해 남중국해를 지배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는 몽골에 패할 경우 경제적 수탈에 그치지 않고 전쟁도구로 내몰려 소모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민족의 존망을 걸고 저..
2021.06.18 -
몽골의 2차 송나라 침략 (2) 왕위 쟁탈전
몽케 대칸이 죽고 몽골군의 철수가 시작되자 송나라 동부전선에서 싸우던 쿠빌라이는 마음이 빠짝 타들어갔다. 자신이 중국에 그리고 동생 훌라구는 서아시아에 묶여 있는 사이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가 열리면 그곳을 통치하던 막내 아릭부케가 대칸으로 선출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철수했다가는 운남성에서 올라오던 우량하타이가 고립될 위험이 컸다. 운남 주둔군은 얼마 전까지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였고 앞으로 벌어질 내전에서 큰 힘이 되어줄 병력이었다. 쿠빌라이는 운남 주둔군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쿠빌라이는 송나라의 예상을 깨고 양쯔강을 건너 악주를 포위했고, 깜짝 놀란 송의 조정은 가사도(賈似道)에게 군사를 주어 이를 구원하도록 했다. 송의 원병 규모가 부담스러웠고 우량하타이도 어느 정도 북상해왔..
2021.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