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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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교체 4) 운명을 건 사르후 전투
여진족이 정면공격을 가해왔으니 명나라가 이를 정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했을 때에도 가정(家丁)이라 불리는 군벌들의 사병이 왜군을 격파하면 뒤에 있던 관군이 달려들어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그런데 이 사병들마저 계속된 내란 과정에서 거의 다 소모되었다. 병사들을 급히 징집해 20만 명 가까이 모았지만 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들이었다. 명나라는 동맹국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머뭇거리는 조선을 닦달해 11,500명을 파견받았다. 여진족 내 누르하치의 경쟁 세력인 예허부도 15,000명을 보내왔다. 특히 조선의 조총수들은 명나라에 절실하게 필요했던 정예병이었다. 명나라 장수들이 서로 이들을 데려가겠다고 싸웠다.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병부시랑 양호가 정벌군..
2021.08.22 -
마지막 전투 4) 무너지는 명나라군
최취는 운남총병관 목성(沐晟)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었다. 목성은 5만 대군을 이끌고 레화 관문에 도착해 있었다. 목성은 명나라 개국공신인 아버지 목영 장군에 이어 운남을 반독립 상태로 지배하고 있었다. 명나라 조정은 직접 관리가 어려운 이 변방을 목씨 집안에 맡기고 대신 가족에게 벼슬을 주어 인질로 수도에 잡아두었다. 목성도 베트남군에 승리하기를 원했지만 이를 위해 자신의 병사들을 희생시킬 생각은 없었다. 만약 막대한 인명피해로 운남의 민심이 흔들리면 자신의 지위도 보장받기 힘들었다. 이 같은 상황을 토대로 레러이는 목성이 유승의 전투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쩐반과 팜반싸오 찡카 응우옌친 레쿠엔 등 쟁쟁한 장군들을 보내면서도 절대 접전하지 말고 대치 상태를 ..
2021.08.02 -
마지막 전투 1) 명장 유승이 온다
왕통의 패전 보고를 받은 명의 선덕제는 기가 막혔다. 천자가 그만하자는 전쟁을 신하들이 강변해 끌고 가더니 애꿎은 수만 병사들의 목숨만 희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 와 베트남에서 손을 들고 나온다면 대제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고 주변 이민족들이 명나라를 업신여겨 다른 마음을 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명 조정은 가능한 최대 병력을 긁어모아 15만 명을 다시 베트남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군량 징발이 여의치 않아 광서성과 광동성에 별도의 관리를 파견해야 했을 정도로 명나라로서도 큰 부담을 안는 원정이었다. 새 원정군의 지휘는 안원후(安遠侯) 유승(柳升)이 맡았다. 그는 베트남 정복에 공을 세워 제후의 반열에 올랐고, 영락제의 오이라트 정벌 때 화총부대를 이끌어 대승을 견인했으며, ..
2021.07.30 -
똣동 쭉동 전투 2) 서전의 패배
1426년 11월 초 왕통 신임 총병관이 이끄는 지원군이 탕롱에 도착하자 명나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왕통은 즉시 베트남군에 대한 반격을 명령했다. 왕통은 탕롱 서쪽에 포진해 있는 베트남군을 소탕하기 위해 탕롱 주둔군과 지원군을 합한 10만 대군을 셋으로 나눠 진군시켰다. 먼저 북쪽에서 자신이 이끄는 우군이 꺼서까지 별 저항 없이 이동했다. 그 남쪽에 방정 장군이 이끄는 중군이 사도이에 도착해 누에 강을 건널 준비를 했다. 가장 남쪽의 좌군은 산수(山壽) 장군과 마기(馬騏) 장군이 지휘했는데 년믁 다리를 건너 탄오아이에 다다랐다. 모두 베트남 선봉대의 거점인 닌끼에우를 향하고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북부의 의병들이 합류했다고는 하지만 명나라 10만 대군에 비해 베트남 선봉대 병력이 턱없이..
2021.07.27 -
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5) 운명의 하롱베이해전
토곤의 절박한 지원 요청을 받은 아버지 쿠빌라이는 번돈해전에서 무사히 돌아온 일부 수송선에다 급히 식량과 배들을 보충해 새로운 선단을 구성했다. 이번에는 오마르의 전투함대를 중국 해남성(하이난)까지 불러 장문호의 수송선단을 호위해 함께 출발하도록 했다. 조심스럽게 베트남 북부해안을 따라 내려온 몽골군의 연합함대가 바익당 강 어귀를 20여km 남겨놓은 꾸아룩 해협 입구를 지날 무렵 기다리던 베트남 수군과 맞닥뜨렸다. 이곳은 오늘날 하롱베이 관광의 중심지인 하롱시 앞바다로 수많은 섬과 바위가 산재해있어 전함들이 은신해 있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지옥을 옮겨놓은 것 같은 대전투가 벌어졌고, 베트남이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오마르 함대가 전함의 숫자나 크기 · 장비 면에서 모두 우위에 있었는데 왜 패했으며 전..
2021.06.29 -
최초의 황제 딘보린
혼란을 수습한 것은 딘보린(丁部領)이었다. 딘보린의 유년 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응오 왕조의 공신으로 당시 남부 국경이었던 응에안 주 차사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후실이었고, 그나마 어릴 때 아버지가 죽어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 가 살아야 했다. 만만치 않은 지방 호족의 딸이었다고는 하지만 유력자에게 후실로 보내졌다 돌아온 어머니가 아들에게 큰 힘이 되어줄 수는 없었다. 딘보린이 성장하며 두각을 나타낼수록 외가 친척들의 견제가 거세졌는데,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이를 모두 극복하고 가문의 수장 지위를 쟁취했다. 딘보린은 시골 유력자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았다. 통솔력과 재력을 갖춘 그가 군사들을 모으자 중앙정부의 눈에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응오 왕조의 마지막 왕인 응오쓰엉반이 딘보린을 정벌하..
2021.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