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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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꿈은 홍강에 떨어지고
쯩짝과 그녀의 참모들은 교착 상태를 타개할 방법을 숙고했다. 그러나 이미 견고하게 다져진 한나라군의 방어망을 뚫어낼 묘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까운 시간만 자꾸 흘러갔다. 사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쯩짝의 군대가 개전 초 국경에서부터 한나라군의 배후를 공격해 보급로를 끊고, 예상하지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기습하고, 그래도 패하면 물러나며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우기가 되면 분산된 적을 공격해 이동을 강요하고, 낯선 지형에 고립시켜 섬멸하는 전술을 사용했으면 이길 수도 있었다. 다만 이런 베트남의 유격전과 전격전 청야전술은 그 후 오랜 세월 수많은 피를 대지에 뿌리며 체득한 것이지, 그 이전의 인물이자 실전 경험조차 없는 쯩짝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쯩짝의 군대와 마원의 ..
2021.05.14 -
압도적 전력 한나라군
쯩짝의 열정과 그녀를 따르는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지만, 베트남이 독립을 쟁취하기에는 국제정세가 너무 나빴다. 쯩짝이 거병했을 때 중국은 이제 막 내전을 수습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 국력이 극성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쯩짝이 상대해야 할 후한(後漢)의 시조 광무제(光武帝)는 정치와 군사 모든 면에서 걸출한 인물이었다. 기원 전후에 한나라가 외척과 환관의 발호로 혼란스러워지자 재상 왕망이 천자에게 양위를 강요해 신(新)나라를 세웠고, 왕망의 비현실적인 이상정치에 반발해 중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한나라 왕족인 유수(劉秀)가 곤양 전투에서 포위된 성을 홀로 빠져 나와 소수의 원군을 모은 뒤 적의 중심부를 타격하는 대담한 작전으로 왕망의 40만 대군을 와해시켰다. 유수는..
2021.05.13 -
남비엣이 역사에 남긴 것
한나라의 당초 계획은 원정군을 다섯으로 나누어 남진하는 것이었다. 명장으로 칭송받던 노박덕이 계양에서 회수로 내려가고, 수군사령관 양복이 예장을 거쳐 횡포로 내려간다. 그리고 남비엣에서 귀순한 과선 장군과 하려 장군, 치의후가 각각 다른 길로 진격해 남비엣의 수도 반우에 집결하기로 했다. 그러나 원정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정규군인 수군은 곧바로 출동이 가능했지만, 주변에서 병사를 차출하고 한 무제가 사면령을 내린 죄수들을 군대로 편성하는 작업은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진노한 천자에게 기다려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준비가 된 부대부터 진격을 시작했다. 양복이 이끄는 수군 수만 명이 심협과 석문을 함락해 남비엣의 전함과 식량을 빼앗았다. 전처럼 한나라가 육로로 침략해올 것이라 예상하다 ..
2021.05.12 -
분노한 한 무제의 침략
왕과 태후의 매국 행위로 나라가 통째로 넘어갈 판국이었다. 승상 르기아를 중심으로 한 백월족 귀족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남비엣 조정에서는 친한파(親漢派)와 반한파(反漢派) 사이에 격렬한 정쟁이 벌어졌다. 승상 르기아는 남비엣의 세 임금을 섬긴 노신으로 집안에 고관대작이 70명이 넘었고 왕실과 몇 겹의 혼인 관계를 맺은 명문가 출신이었다. 나라에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많아 왕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태후가 르기아를 죽이자고 재촉했지만, 애왕과 한나라 사신들은 그를 해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 무제는 답답한 상황을 보고받고 한천추에게 병사 2천 명을 주며 남비엣으로 가 르기아를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한 무제는 남비엣 합병이 단지 정쟁 때문에 미뤄지는 것이고 르기아만 체포하면 걸림돌이 모두 사라질 ..
2021.05.11 -
나라가 자주성을 잃었을 때
찌에우다는 무려 70년 동안 남비엣을 통치한 뒤 기원전 137년 사망했다. 이와 함께 남비엣의 황금기도 저물어갔다. 찌에우다의 후계자들은 그의 기상을 물려받지 못했다. 찌에우다의 왕위를 손자인 문제(文帝)가 이었다. 즉위 2년 뒤 민월(閩越)의 왕이 남비엣을 공격해왔다. 그동안 찌에우다에게 눌려있던 민월이 남비엣 정권 교체의 틈을 노려 반전을 시도한 것이었다. 당연히 문제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자신과 국가의 명운을 걸고 싸웠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한나라에 도움을 청한 것이다. 한나라는 왕회와 한안국 두 장군을 보내 민월을 치도록 했다. 과거의 한나라가 아니었다. 고조 유방이 흉노에게 참패한 뒤 한나라는 가능하면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고립주의를 채택했다. 그 결과 한나라는 ..
2021.05.11 -
남비엣은 황제의 나라
평탄했던 남비엣과 한나라의 관계는 십여 년 뒤 큰 고비를 맞았다. 고조가 죽고 그의 억척스러운 아내 여치(呂雉)가 태후가 되어 어린 황제 대신 통치했다. 관리 한 명이 여 태후에게 남비엣으로의 철 수출을 금해달라고 주청해 그렇게 시행했다. 수입한 철제 무기와 농기구로 남비엣이 세력을 키우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발끈한 찌에우다는 이를 장사왕 오예의 계략으로 간주했다. 한나라 장수였던 오예는 내전 때의 공으로 장사군과 예장군 상군 계림군 남해군을 영지로 하는 장사왕에 책봉됐다. 그러나 상군과 계림군 남해군을 이미 찌에우다가 장악하고 있어 장사왕의 영지가 어정쩡해졌다. 찌에우다는 장사왕이 한나라 황실의 힘을 빌어 자신을 멸망시키고 영지를 빼앗으려 음모를 꾸몄다고 본 것이다. 찌에우다는 한나라와의 군신관계를..
2021.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