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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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황제 딘보린
혼란을 수습한 것은 딘보린(丁部領)이었다. 딘보린의 유년 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응오 왕조의 공신으로 당시 남부 국경이었던 응에안 주 차사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후실이었고, 그나마 어릴 때 아버지가 죽어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 가 살아야 했다. 만만치 않은 지방 호족의 딸이었다고는 하지만 유력자에게 후실로 보내졌다 돌아온 어머니가 아들에게 큰 힘이 되어줄 수는 없었다. 딘보린이 성장하며 두각을 나타낼수록 외가 친척들의 견제가 거세졌는데,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이를 모두 극복하고 가문의 수장 지위를 쟁취했다. 딘보린은 시골 유력자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았다. 통솔력과 재력을 갖춘 그가 군사들을 모으자 중앙정부의 눈에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응오 왕조의 마지막 왕인 응오쓰엉반이 딘보린을 정벌하..
2021.05.22 -
계속되는 저항과 좌절
쯩짝의 반란 이후에도 베트남인들은 독자적으로 때로는 토착화한 중국 이주민들과 함께 저항을 이어갔다. 중국에서 후한이 망하고 삼국이 병립하는 시기에 베트남 땅은 오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그때 또 한 명의 여성 반란 지도자인 찌에우어우가 나타났다. 찌에우어우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오빠 찌에우꾸옥닷과 함께 살았다. 그녀가 20살 되던 해 오빠가 결혼했는데 올케의 구박이 심하자 살해하고 산속으로 도망쳤다. 힘세고 똑똑했던 찌에우어우는 갖가지 이유로 도망쳐온 장정 천여 명을 휘하에 거느리게 되었다. 그 사이 마을에서는 중국인 관리의 폭정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오빠 찌에우꾸옥닷의 인도로 반란을 일으켰고, 찌에우어우는 산에서 내려와 이에 합류했다. 그녀의 용맹을 보고 주민들은 그녀를 지도자로 세웠다. 찌에우어우는 “..
2021.05.17 -
남비엣이 역사에 남긴 것
한나라의 당초 계획은 원정군을 다섯으로 나누어 남진하는 것이었다. 명장으로 칭송받던 노박덕이 계양에서 회수로 내려가고, 수군사령관 양복이 예장을 거쳐 횡포로 내려간다. 그리고 남비엣에서 귀순한 과선 장군과 하려 장군, 치의후가 각각 다른 길로 진격해 남비엣의 수도 반우에 집결하기로 했다. 그러나 원정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정규군인 수군은 곧바로 출동이 가능했지만, 주변에서 병사를 차출하고 한 무제가 사면령을 내린 죄수들을 군대로 편성하는 작업은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진노한 천자에게 기다려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준비가 된 부대부터 진격을 시작했다. 양복이 이끄는 수군 수만 명이 심협과 석문을 함락해 남비엣의 전함과 식량을 빼앗았다. 전처럼 한나라가 육로로 침략해올 것이라 예상하다 ..
2021.05.12 -
남비엣은 황제의 나라
평탄했던 남비엣과 한나라의 관계는 십여 년 뒤 큰 고비를 맞았다. 고조가 죽고 그의 억척스러운 아내 여치(呂雉)가 태후가 되어 어린 황제 대신 통치했다. 관리 한 명이 여 태후에게 남비엣으로의 철 수출을 금해달라고 주청해 그렇게 시행했다. 수입한 철제 무기와 농기구로 남비엣이 세력을 키우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발끈한 찌에우다는 이를 장사왕 오예의 계략으로 간주했다. 한나라 장수였던 오예는 내전 때의 공으로 장사군과 예장군 상군 계림군 남해군을 영지로 하는 장사왕에 책봉됐다. 그러나 상군과 계림군 남해군을 이미 찌에우다가 장악하고 있어 장사왕의 영지가 어정쩡해졌다. 찌에우다는 장사왕이 한나라 황실의 힘을 빌어 자신을 멸망시키고 영지를 빼앗으려 음모를 꾸몄다고 본 것이다. 찌에우다는 한나라와의 군신관계를..
2021.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