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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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교체 8) 영원성을 지킨 마지막 영웅
웅정필을 죽이고 나니 국경을 지킬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이때 하급관리였던 원숭환이 단신으로 후금 진영을 염탐하고 돌아와 그들의 사정을 보고했다. 그는 문관이었으나 어렸을 때부터 군사에 관심이 많았고 각종 병법에 능통했다. 명나라 조정은 원숭환을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은화 20만 냥을 주고 산해관 밖을 지키게 했다. 그는 산해관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영원을 방어거점으로 정하고 새로 성을 쌓았다. 마침 이때 서광계가 완고한 조정을 설득해 포르투갈 홍이포(紅夷砲) 30문을 들여와 11문을 산해관에, 19문은 북경성에 설치했다. 원숭환은 산해관 홍이포 중 일부를 영원성으로 옮기고 화포 전문가를 불러 부하들을 훈련시켰다. 그런데 새로운 요동경략으로 고제라는 자가 임명됐다. 고제는 병력이 산개해 있으면 각..
2021.08.26 -
명청교체 4) 운명을 건 사르후 전투
여진족이 정면공격을 가해왔으니 명나라가 이를 정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했을 때에도 가정(家丁)이라 불리는 군벌들의 사병이 왜군을 격파하면 뒤에 있던 관군이 달려들어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그런데 이 사병들마저 계속된 내란 과정에서 거의 다 소모되었다. 병사들을 급히 징집해 20만 명 가까이 모았지만 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들이었다. 명나라는 동맹국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머뭇거리는 조선을 닦달해 11,500명을 파견받았다. 여진족 내 누르하치의 경쟁 세력인 예허부도 15,000명을 보내왔다. 특히 조선의 조총수들은 명나라에 절실하게 필요했던 정예병이었다. 명나라 장수들이 서로 이들을 데려가겠다고 싸웠다.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병부시랑 양호가 정벌군..
2021.08.22 -
명청교체 3) 명나라의 첫 패배, 무순 전투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군은 1618년 4월 15일 무순성을 포위했다. 성 아래 새까맣게 모여둔 후금군을 보고 겁이 난 무순성 성주 이영방은 얼른 항복했다. 무혈 입성한 누르하치는 성안에 있던 명나라 상인 10여 명을 풀어줬다. 그는 상인들에게 여비까지 챙겨주며 고향에 돌아가 후금의 ‘칠대한’ 문서를 퍼뜨리라고 말했다. 사실 시키지 않더라도 상인들이 돌아가면 이 엄청난 난리에 대해 떠들텐데, 칠대한 문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금이 악당이라 전쟁이 난 게 아니라 명나라 조정의 박해 때문이라는 선전전의 일환이었다. 누르하치는 무순 성벽을 무너뜨린 뒤 주민들을 모두 포로로 끌고 갔다. 인구가 부족한 후금에게 땅보다는 사람이 더 귀한 자원이었다. 며칠 뒤 총병 장승음이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그러..
2021.08.21 -
명청교체 2) 후금 건국과 숨 막히는 압박
구러산 전투의 승리는 만주의 세력 판도를 바꿔놓았다. 여러 부족들이 누르하치를 새로운 강자로 인정했다. 몽골에서도 코르친 부족과 칼카 부족이 복종의 뜻을 전해왔다. 누르하치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인구가 적은 여진족이 명나라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몽골족과 제휴가 반드시 필요했다. 누르하치는 본인뿐 아니라 왕자들에게도 몽골족과 혼인을 적극 권장하여 두 민족의 융합에 노력했다. 누르하치는 해서여진 부족들을 각개격파해나갔다. 그들은 서로 사이가 나빠 단합하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그 틈을 파고들어 공격하거나 내정에 간섭하며 세력을 넓혔다. 해서여진 부족들을 놓고 예허부와 누르하치의 쟁탈전이 벌어졌다. 명나라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예허부의 편을 들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예허부 외에는 해서여진의 모든 부족들이 누르하치..
2021.08.20 -
명청교체 1) 맨손으로 시작한 누르하치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는 1559년 요동반도 소자하 강변의 작은 성 허투알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여진족 족장이었지만 일가가 세력을 잃어 주변 부족들의 눈치를 보며 사는 처지였다. 당시 여진족은 명나라의 분열정책 때문에 수십 개 부족으로 나뉘어 갈등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학대를 받았다. 일찍 결혼한 뒤에는 분가해 인삼을 캐고 장사를 하며 힘겹게 살았다. 여진족은 몽골족과 달리 순수한 유목민이 아니었다. 산에서 채취한 인삼과 동물 가죽을 명나라 조선에 팔고 식량을 들여오는 무역에 크게 의존했다. 명나라는 이 무역 허가권으로 여진족을 조종했다. 당시 명나라의 동북면 책임자는 이성량이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됐던 이여송의 아버지이다. 이성량은 수많은 전투에서 여진족..
2021.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