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남성(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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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교체 12) 삼번의 난과 배신자 말로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하는 데는 항복한 명나라 장수들의 역할이 컸다. 청나라는 전쟁이 끝난 뒤 이들에게 각지의 총독 순무 등의 자리를 나눠주었다. 특히 공이 큰 오삼계는 운남성, 경중명은 복건성, 상가희는 광동성의 번왕으로 임명했다. 번왕은 온갖 특혜가 보장되는 작위였다. 독자적인 군대를 보유할 수 있는 데다, 정치 경제적으로 독립되고, 세습까지 가능했다. 오삼계 등 번왕들은 영지에서 세력을 더 키워 나갔다. 직할 병력과 세수 지역을 마음대로 넓히고, 주변 성들의 인사까지 개입했다. 대륙 정복 초기에는 청나라 조정이 이를 참아넘겼다. 절대다수인 한족에게 만주족의 지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때까지는 번왕 등 한족 협력자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새로운 황제가 된 강희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2021.08.30 -
명나라의 식민지배 2) 후쩐(後陳)왕조의 봉기
오랜 세월 자주권을 누렸던 베트남인들이 명나라의 지배에 순응할 수는 없었다. 명의 원정권 사령관이었던 장보(張輔)가 종전 몇 달 뒤 귀국하자 곧바로 반란이 일어났다. 여러 독립투쟁 세력 가운데 쩐왕조 8대 황제 예종의 아들로 알려진 쩐꾸이(陳頠)가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407년 황제를 자칭해 간정제(簡定帝)라 불리었으며 연호까지 제정했다. 이를 후쩐(後陳)왕조라고 부른다. 쩐꾸이는 그동안 명에 협조해 세력을 유지해왔던 여러 옛 쩐 왕족들의 귀부를 받아 힘을 키운 뒤 응에안 지방에서 탕롱을 향해 진격했다. 쩐꾸이의 군대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과 관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와 뒤를 따랐다고 기록돼 있다. 놀란 명 조정은 운남성에 주둔하고 있던 목성(沐晟)에게 예하 병력 4만 명을 이끌고 가 탕롱의 명나라..
2021.07.16 -
본색을 드러내는 명나라
과감한 개혁으로 국내 질서를 수습한 호뀌리는 점증하는 명나라의 위협에 맞서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쩐왕조 말기 중원의 패자가 된 명나라는 아직 체제가 불안정하던 건국 초기에는 베트남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명은 홍건적의 난에서 시작된 원나라 축출 전쟁이 한창일 때 베트남에 먼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고, 1368년 주원장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베트남이 축하 사절을 보내 조공하자 유종(裕宗)을 안남국왕에 봉해 정식 국교를 맺었다. 그러나 국내 혼란을 수습하고 대외팽창이 가능할 만큼 힘을 갖추자 명나라는 강국의 본색을 드러내 베트남에게 갖은 요구를 해오기 시작했다. 운남성에서 일어난 소요를 진압하는 데 필요하다며 군량미 5천 석을 달라고 했고, 광서성 반란 토벌을 이유로 군량미 2만 ..
2021.07.12 -
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1) 자만이 부른 패배
1287년 11월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친 몽골군은 베트남 국경을 다시 넘었다. 쿠빌라이의 아들 토곤이 이번에도 총사령관을 맡아 몽골족 정예군 7만 명을 지휘했다. 중국 운남성과 해남성에서 징발한 현지인 2만1천 명이 협공 부대를 편성했고, 아바치가 이끄는 1천 명의 돌격대가 선봉에 섰다. 그리고 오마르의 수군이 500척의 대선단으로 육군의 진격을 지원했다. 쿠빌라이는 역전의 노장인 아릭카이야, 나시루딘과 자신의 손자인 테무르까지 베트남 공격에 합류시키는 등 원정의 성공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몽골은 베트남의 청야(淸野) 전술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군량을 모두 바닷길로 운반해 간다는 계획이었다. 이미 이전 2차 침략 때부터 몽골은 군사전술에 큰 변화를 감수했다. 본래 군수품의 현지 조달이 몽골군..
2021.06.24 -
몽골의 2차 송나라 침략 (2) 왕위 쟁탈전
몽케 대칸이 죽고 몽골군의 철수가 시작되자 송나라 동부전선에서 싸우던 쿠빌라이는 마음이 빠짝 타들어갔다. 자신이 중국에 그리고 동생 훌라구는 서아시아에 묶여 있는 사이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가 열리면 그곳을 통치하던 막내 아릭부케가 대칸으로 선출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철수했다가는 운남성에서 올라오던 우량하타이가 고립될 위험이 컸다. 운남 주둔군은 얼마 전까지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였고 앞으로 벌어질 내전에서 큰 힘이 되어줄 병력이었다. 쿠빌라이는 운남 주둔군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쿠빌라이는 송나라의 예상을 깨고 양쯔강을 건너 악주를 포위했고, 깜짝 놀란 송의 조정은 가사도(賈似道)에게 군사를 주어 이를 구원하도록 했다. 송의 원병 규모가 부담스러웠고 우량하타이도 어느 정도 북상해왔..
2021.06.16 -
운남 대리국을 정복한 몽골
칭기즈칸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다. 몽골의 전통에 따르면 막내아들이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아야 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용맹한 장수였던 막내아들 툴루이 대신 현명한 셋째아들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칭기즈칸 사후 몽골 족장들은 이를 무시하고 전통에 따라 툴루이를 새로운 칸으로 선출했다. 툴루이는 2년간 임시 칸으로 있다가 아버지의 결정을 지키기 위해 형 오고타이에게 제위를 양보했다. 오고타이에 이어 그의 장남 귀위크가 어머니의 도움으로 몽골 제국의 제3대 칸이 되었다. 그는 현명하고 결단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정적인 바투를 굴복시키기 위해 원정길에 올랐다 즉위 2년 만에 병사해 어떤 업적을 남기기에는 치세가 너무 짧았다. 귀위크가 죽자 툴루이의 막내아들 몽케가 칸의 자리에 올랐다..
2021.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