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왕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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똣동 쭉동 전투 4) 고립된 명나라군
타잉화에 머물러 있던 레러이는 승전보 속에 탕롱 인근으로 본진을 옮겼다. 레러이가 탕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자 성 밖에 주둔하고 있던 방정 장군의 마지막 부대마저 수비를 포기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 탕롱성은 외부와 고립되게 되었다. 레러이는 탕롱을 포위하는 한편 인근의 박닌 푸토 남딘 등 크고 작은 성들을 모조리 공격해 점령했다. 베트남의 정치 · 경제 중심지인 홍강 유역 통제권까지 이제 레러이가 장악하게 되었다. 패색이 짙어진 왕통은 레러이에게 협상 의사를 밝혔다. 레러이가 쩐왕조를 복위시키면 철군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당초 명의 베트남 침략 명분이 호뀌리의 왕위 찬탈을 징벌한다는 것이었으니, 쩐왕조를 다시 세우면 명나라군이 물러가도 크게 체면을 깎이지 않을 법도 했다. 레러이는 “전쟁의 고통으로부터 ..
2021.07.29 -
본색을 드러내는 명나라
과감한 개혁으로 국내 질서를 수습한 호뀌리는 점증하는 명나라의 위협에 맞서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쩐왕조 말기 중원의 패자가 된 명나라는 아직 체제가 불안정하던 건국 초기에는 베트남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명은 홍건적의 난에서 시작된 원나라 축출 전쟁이 한창일 때 베트남에 먼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고, 1368년 주원장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베트남이 축하 사절을 보내 조공하자 유종(裕宗)을 안남국왕에 봉해 정식 국교를 맺었다. 그러나 국내 혼란을 수습하고 대외팽창이 가능할 만큼 힘을 갖추자 명나라는 강국의 본색을 드러내 베트남에게 갖은 요구를 해오기 시작했다. 운남성에서 일어난 소요를 진압하는 데 필요하다며 군량미 5천 석을 달라고 했고, 광서성 반란 토벌을 이유로 군량미 2만 ..
2021.07.12 -
호(胡)왕조의 과감한 개혁
쩐왕조 말기의 오랜 혼란은 필연적으로 권문세가에 의한 토지겸병을 불러왔다. 유력자들이 땅을 뺐고 개간해 늘려가면서 많은 백성들은 유랑하거나 농노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세금을 낼 공전(公田)과 병역에 동원할 장정들을 확보하지 못하면 새 왕조의 재정을 충당하고 외적의 침략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호뀌리는 과감하게 한전법(限田法)을 실시했다. 모든 귀족과 관리 백성들에게 신분에 따라 토지 소유의 한도를 정해 주었다. 그리고 5년마다 자기 땅 위에 이름과 면적을 적은 푯말을 세우도록 하고 푯말이 없는 땅은 모조리 압수해 국유지로 만들었다. 쩐씨 왕족을 비롯한 구 지배층의 물적 토대가 한꺼번에 붕괴됐고, 호뀌리 정권에 도전할 신흥세력의 등장도 예방할 수 있었다. 대신 국고에는 엄청난 세수가 쏟아져 들어왔고,..
2021.07.12 -
쩐왕조의 비극적 종말
참파와의 전쟁은 끝났지만, 왕조를 지키려는 자와 바꾸려는 자들의 싸움은 이제 정점을 향해 치달았다. 레뀌리는 태상황 예종(藝宗)을 부추겨 정적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거나 암살하거나 자결을 강요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제거해갔다. 판단력을 잃고 휘둘리던 예종이 그나마 사망하자 레뀌리는 더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레뀌리는 임금인 순종(順宗)을 겁박해 1397년 수도를 탕롱에서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타잉화로 옮겼다. 그리고 천도 다음해 순종에게 이제 겨우 세 살인 태자를 왕위에 올리고 태상황으로 물러나도록 강요했다. 순종은 모든 요구에 순순히 따르며 목숨만이라도 부지하려 했지만, 이제 새 왕조를 꿈꾸는 레뀌리는 권력에 위협이 될 작은 가능성마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퇴위한 뒤 도교사원에 들어가 있던 순종은 레..
2021.07.11 -
베트남은 전쟁을 준비했다
베트남에게 중국은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면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정세 변화에 맞춰 시시각각 대응책을 세워야만 국가의 존립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런 베트남이 화북에서 벌어진 몽골과 금나라의 사활을 건 싸움을 모를 리 없었다. 아직은 수천 리 떨어진 전란이었지만 언제든 그 불똥이 남쪽으로 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베트남 위정자들의 마음속에 깃들기 시작했다. 쩐왕조는 방위력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쩐왕조는 먼저 국경지역 소수민족들을 껴안으려 노력했다. 족장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거나 족장의 딸을 왕실에 맞아들이는 혼인정책으로 유대를 강화했다. 또한 족장들에게 관직을 주고 자기 부락을 마치 식읍처럼 장악할 수 있도록 허용해 환심을 샀다. 그래도 므엉족 타이족 등 저항하는 부족들은 무력으로 진..
2021.06.11 -
결속력이 유별났던 쩐(陳)왕조
쩐왕조는 이전 베트남 왕조들에 비해 왕족의 결속력이 유난히 강한 특징이 있었다. 왕은 물론 태위와 군 지휘관들, 지방의 주요 성주들까지 왕족이 독차지하는 이른바 ‘종실독점 지배 체제’를 형성했다. 이는 험한 바다 위에서 생사를 같이 해온 쩐씨 집안의 성장 과정에서 영향을 받았고, 베트남의 정치체제가 지방분권에서 중앙집권으로 변해가는 과도기적 형태이기도 했다. 그것이 정의로운가를 별론으로 한다면, 종실독재는 국가 자원의 관리와 동원에 매우 효율적인 체제였다. 쩐씨 가문의 실력자들은 지방의 대토지를 하사받고 독립적인 군대도 보유했다. 그들이 중앙에 도전할 경우 자칫 통치체제가 균열될 수도 있었지만, 왕과 권력자들 사이에 한집안이라는 강한 유대감이 유지됐다. 권력자들의 대토지 소유는 유랑하던 농민들을 정착시키..
2021.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