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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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 2차 봉기 1) 숭고한 희생
람선 봉기군은 빠르게 세력을 회복했다. 레러이는 새로 모인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성을 쌓고, 기동전에 대비해 곳곳에 식량을 숨겨두었다. 그는 위축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백성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과감한 군사 작전을 계획했다. 이번에는 람선 동쪽 명나라군 주둔지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당시 명 원정군은 탕롱 등 홍강 유역에 주로 배치됐고, 중부와 남부의 다수 지역은 귀순한 베트남 군벌들에게 수비를 맡기었다. 이른바 지방군이었는데, 명에서 온 중국인 부대에 비해서는 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레러이가 노린 약한 고리였다. 레러이는 병사들을 므엉못 산 입구에 매복시키고 명나라군을 유인하기로 했다. 소수의 람선 병사들이 명나라군 기지를 공격하다 후퇴하자, 아니나 다를까 적 병사들이..
2021.07.19 -
몽골의 2차 베트남 침략 (4) 물러가는 적들
수세에 몰린 몽골군은 몇몇 성들에 틀어박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보급선이 끊어진데다 베트남의 청야전술로 어디서도 쌀 한 톨 구할 수 없었던 몽골 병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우기가 계속되면서 진중에 전염병도 퍼졌다. 토곤이 1차 침략의 실패 원인을 분석해 원정군에 중국 의사들을 대거 동행시켰지만 근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토곤은 결국 철군을 결심했다. 몽골군은 중국 광서성과 운남성의 본래 주둔지를 향해 북동쪽과 북서쪽 두 갈래로 나뉘어 빠르게 퇴각했다. 토곤 자신은 킵차크 출신 시도르가 이끄는 수군의 배를 타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육로로 이동한 대부분의 부대는 베트남군의 격렬한 반격에 시달렸다. 쩐꾸옥뚜언은 홍강 북쪽에 5만 명의 병력을 보내 몽골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반끼엡, 노이방..
2021.06.22 -
서툴렀던 응오(吳) 왕조
해방의 환희가 잦아든 뒤 찾아온 베트남의 현실은 꿈꾸어왔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응오꾸엔은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새로운 율령들을 잇달아 공포했다. 그러나 문무관직과 각종 의식, 관리들의 복제까지 중국 것을 거의 모방하다시피 했다. 정치적 예속은 극복했지만 스스로 통치체제를 정립할 역량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불완전한 국가 통합과 이로 인한 혼란이었다. 중국의 분열을 틈타 베트남 각지에서 세력을 키워온 군벌들은 어제까지 동료 장군이었던 응오꾸엔에게 존경심을 보일지언정 왕조에 충성하는 것에는 주저했다. 군벌들은 응오 왕조가 수립된 뒤에도 각자의 군사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왕권을 위협했다. 비엣족 거주지 밖의 소수민족들은 사실상 독립 상태로 중앙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못했다. 불과 ..
2021.05.21 -
바익당강에서 끊은 천년의 사슬
베트남이 중국의 혼란기를 맞아 응오꾸엔 같은 천재적인 전략가의 지휘를 받게 된 것은 독립을 위한 하늘의 도움이었다. 그는 키가 크고 건장하여 어릴 적부터 장수로 촉망받았고 지력과 담력까지 겸비한 인물이었다. 응오꾸엔의 아버지 역시 유력한 지방 호족으로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응오꾸엔은 33살에 즈엉딩응에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남한군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즈엉딩응에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즈엉딩응에는 응오꾸엔을 계속 승진시켜 아이주의 통치를 맡겼는데, 그곳은 즈엉딩응에의 고향이자 군사력의 기반이었다. 양아버지 즈엉딩응에를 암살한 끼에우꽁띠엔은 처남 응오꾸엔이 봉기하자 위협을 느끼고 남한에 스스로 신하가 될 것을 청하는 매국적인 행동을 했다. 끼에우꽁띠엔이 구원을 요..
2021.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