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강(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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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황제 딘보린
혼란을 수습한 것은 딘보린(丁部領)이었다. 딘보린의 유년 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응오 왕조의 공신으로 당시 남부 국경이었던 응에안 주 차사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후실이었고, 그나마 어릴 때 아버지가 죽어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 가 살아야 했다. 만만치 않은 지방 호족의 딸이었다고는 하지만 유력자에게 후실로 보내졌다 돌아온 어머니가 아들에게 큰 힘이 되어줄 수는 없었다. 딘보린이 성장하며 두각을 나타낼수록 외가 친척들의 견제가 거세졌는데,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이를 모두 극복하고 가문의 수장 지위를 쟁취했다. 딘보린은 시골 유력자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았다. 통솔력과 재력을 갖춘 그가 군사들을 모으자 중앙정부의 눈에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응오 왕조의 마지막 왕인 응오쓰엉반이 딘보린을 정벌하..
2021.05.22 -
베트남 민족은 왜 사라지지 않았나
베트남이 무려 천 년 동안이나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도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고 끝내 독립을 쟁취한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여기에는 중국의 대 베트남 정책에도 한 원인이 있었다. 역대 중국 왕조는 베트남을 남방의 진귀한 산물의 공급원이자 동남아시아 무역 중계지라는 전략적 가치로 보았지 베트남인들을 교화시켜 통합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무역 중심지가 베트남 홍강 하류에서 지금의 중국 광저우로 옮겨가자 베트남을 주변 민족의 중국 공격을 막는 완충지대 정도로 여기게 되었다. 중국 측 사가들은 베트남인의 무력저항들을 현지 관리의 무능과 정책의 미비로 인한 일시적 사건이었던 것으로 치부했다. 예를 들어 쯩 자매의 봉기를 ‘이상한 베트남 여자의 반란’으로 치부하는 식이었다. 중국에서 파견된 태수들..
2021.05.20 -
그곳에 가면) 쯩 자매 순국지
쯩짝과 쯩니 자매를 기리는 사당은 베트남에 세 곳이 있다. 그중 선떠이성 핫몬의 사당이 가장 크고 오래됐다. 핫몬 사당으로 가기 위해 하노이에서 북쪽으로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농로로 벗어나 또 한참을 이동했다. 초행인 운전기사가 자신감을 잃을 무렵 ‘하이바쯩(Hai Bà Trưng) 사당’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였다. ‘하이’는 둘, ‘바’는 아주머니라는 뜻이다. 이제 다 왔나 싶었지만, 길은 동네로 이어져 마주 오는 차가 있을지 걱정되는 좁은 골목으로 꽤 들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아름다운 사당이 나타났다. 하이바쯩 사당은 넓고 잘 정리돼 있었다. 새로 지어진 대리석 시설들이 베트남 정부가 사당 관리에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사당의 본관은 고색창연함을 잃지 않았다. 핫몬 사당은 10세기에 처음..
2021.05.16 -
독립의 꿈은 홍강에 떨어지고
쯩짝과 그녀의 참모들은 교착 상태를 타개할 방법을 숙고했다. 그러나 이미 견고하게 다져진 한나라군의 방어망을 뚫어낼 묘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까운 시간만 자꾸 흘러갔다. 사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쯩짝의 군대가 개전 초 국경에서부터 한나라군의 배후를 공격해 보급로를 끊고, 예상하지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기습하고, 그래도 패하면 물러나며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우기가 되면 분산된 적을 공격해 이동을 강요하고, 낯선 지형에 고립시켜 섬멸하는 전술을 사용했으면 이길 수도 있었다. 다만 이런 베트남의 유격전과 전격전 청야전술은 그 후 오랜 세월 수많은 피를 대지에 뿌리며 체득한 것이지, 그 이전의 인물이자 실전 경험조차 없는 쯩짝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쯩짝의 군대와 마원의 ..
2021.05.14 -
최초의 국가 반랑
“주나라 장왕 때 베트남에 마술로 각 부락을 제압한 기인이 있었는데, 그가 스스로 흥왕(Hùng Vương, 雄王)이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반랑으로 지었다.” 14세기에 쓴 베트남의 역사서 「월사략」에 나오는 내용이다. 중국 주나라 장왕 때라면 B.C. 7세기로 지금부터 2,700년 전이다. 학자들은 실제로 이때쯤 반랑이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신기하게도 고조선의 건국 시기와 비슷하다. 흥왕이 마술로 각 부락을 제압했다는 「월사략」의 기록은 단군왕검의 ‘단군’이 제사장을 의미하는 것과 맥이 통해 흥미롭다. 자연의 힘에 압도되고 항상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아야 했던 고대인들은 초월적인 힘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능숙한 솜씨로 신비한 현상을 만들어 보이며 그 ..
2021.05.08 -
홍강 삼각주의 선사시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베트남 홍강 유역에는 많은 민족들이 살았다. 베트남 등뼈를 이루는 쯔엉썬(長山)산맥과 동쪽 바다 사이에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이다. 홍강은 멀리 중국 운남성에서부터 붉은 흙을 품어와 강 하류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래서 우리나라 강원도 면적만큼 넓은 삼각주가 만들어졌다. 이곳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30만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였다. 그때는 농사를 지을 줄도 몰랐다. 변화는 아주 더뎠다. 구석기시대 사람이 타임머신을 얻어 타고 몇 만 년 미래로 가도 후손들이 자기와 똑같이 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다 신석기시대에 들어 드디어 농사가 시작됐다. 1만7천 년 전 유적부터 돌을 갈아 만든 쟁기들이 발굴된다. 농사가 시작되면서 홍강 유역은 더욱더 살기 좋은 땅이 되었다. 아열..
2021.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