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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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식민지배 2) 후쩐(後陳)왕조의 봉기
오랜 세월 자주권을 누렸던 베트남인들이 명나라의 지배에 순응할 수는 없었다. 명의 원정권 사령관이었던 장보(張輔)가 종전 몇 달 뒤 귀국하자 곧바로 반란이 일어났다. 여러 독립투쟁 세력 가운데 쩐왕조 8대 황제 예종의 아들로 알려진 쩐꾸이(陳頠)가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407년 황제를 자칭해 간정제(簡定帝)라 불리었으며 연호까지 제정했다. 이를 후쩐(後陳)왕조라고 부른다. 쩐꾸이는 그동안 명에 협조해 세력을 유지해왔던 여러 옛 쩐 왕족들의 귀부를 받아 힘을 키운 뒤 응에안 지방에서 탕롱을 향해 진격했다. 쩐꾸이의 군대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과 관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와 뒤를 따랐다고 기록돼 있다. 놀란 명 조정은 운남성에 주둔하고 있던 목성(沐晟)에게 예하 병력 4만 명을 이끌고 가 탕롱의 명나라..
2021.07.16 -
명나라의 식민지배 1) 수탈과 문화파괴
쩐왕조 복원이라는 명나라의 개전 명분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베트남인들을 위무하기 위해 3년간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주겠다고 선포했지만 호왕조의 잔여 세력이 소멸하자 이 역시 흐지부지됐다. 그리고 중국에서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관리들이 떼 지어 오면서 본격적인 수탈이 시작됐다. 애당초 명나라 군대가 좋은 일을 하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명의 식민정부는 반란을 우려해 베트남인들이 무기를 제조하거나 소지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고 저항의 수단이 제거된 베트남인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병합 1년도 안 돼 베트남에서 거둬들인 세금이 우마 24만 마리, 벼 1360만 석, 배 8670척 등이었다. 가난한 산악국가였던 중세 베트남의 경제를 거의 거덜 내다시피 한 것이다. 16세부터 60세까지 모든 남자는 군역과 부역..
2021.07.15 -
명나라의 베트남 정복
국경 충돌 소식을 들은 명나라 영락제는 왕을 시해하고 나라를 빼앗은 호씨 부자를 응징하겠다며 베트남 정벌을 선언했다. 그리고 1406년 11월 명의 20만 대군이 베트남 땅에 들어섰다. 명의 원정군은 둘로 나뉘어 동군은 광서성에서 랑썬을 거쳐 서진하고 서군은 윈난성에서 출발해 홍강을 따라 남진했다. 과거 중국의 침략 경로 그대로였다. 동군은 장보(張輔) 서군은 목성(沐晟)이 지휘했는데, 명나라 장군 다수가 대몽전쟁과 내전을 거치며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장보는 당대의 명장이었다. 호뀌리 정권은 선조들이 중국 침략군을 물리친 모든 전술들을 동원해 맞섰다. 즉 적이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퇴각하는 청야전술, 소규모 부대들이 끊임없이 적 후방에 나타나 공격하는 유격전술, 보급로를 끊..
2021.07.14 -
다가오는 전쟁의 먹구름
대내외 정책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 호뀌리는 과거 침략에 대한 복수와 향후 대명 전쟁 시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참파를 공격했다. 참파는 포 비나수르가 죽은 뒤 다시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호뀌리는 즉위한 해에 참파를 공략했다가 실패했지만, 2년 뒤 재정비된 군대를 보내 대승을 거두었다. 참파 국왕은 영토 일부를 떼어주며 강화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세가 오른 호뀌리는 아예 참파를 병합할 목적으로 1403년 20만 대군을 일으켜 침략했다. 베트남군은 수도 비자야를 포위했지만 참파군이 끈질기게 저항하고 한 달 만에 군량이 떨어지자 철수하고 말았다. 망국의 위기에 놓인 참파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청했고, 명이 이를 받아들여 전쟁을 중단하도록 베트남에 중재했다. 베트남의 약세..
2021.07.13 -
본색을 드러내는 명나라
과감한 개혁으로 국내 질서를 수습한 호뀌리는 점증하는 명나라의 위협에 맞서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쩐왕조 말기 중원의 패자가 된 명나라는 아직 체제가 불안정하던 건국 초기에는 베트남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명은 홍건적의 난에서 시작된 원나라 축출 전쟁이 한창일 때 베트남에 먼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고, 1368년 주원장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베트남이 축하 사절을 보내 조공하자 유종(裕宗)을 안남국왕에 봉해 정식 국교를 맺었다. 그러나 국내 혼란을 수습하고 대외팽창이 가능할 만큼 힘을 갖추자 명나라는 강국의 본색을 드러내 베트남에게 갖은 요구를 해오기 시작했다. 운남성에서 일어난 소요를 진압하는 데 필요하다며 군량미 5천 석을 달라고 했고, 광서성 반란 토벌을 이유로 군량미 2만 ..
2021.07.12 -
쩐왕조의 비극적 종말
참파와의 전쟁은 끝났지만, 왕조를 지키려는 자와 바꾸려는 자들의 싸움은 이제 정점을 향해 치달았다. 레뀌리는 태상황 예종(藝宗)을 부추겨 정적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거나 암살하거나 자결을 강요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제거해갔다. 판단력을 잃고 휘둘리던 예종이 그나마 사망하자 레뀌리는 더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레뀌리는 임금인 순종(順宗)을 겁박해 1397년 수도를 탕롱에서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타잉화로 옮겼다. 그리고 천도 다음해 순종에게 이제 겨우 세 살인 태자를 왕위에 올리고 태상황으로 물러나도록 강요했다. 순종은 모든 요구에 순순히 따르며 목숨만이라도 부지하려 했지만, 이제 새 왕조를 꿈꾸는 레뀌리는 권력에 위협이 될 작은 가능성마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퇴위한 뒤 도교사원에 들어가 있던 순종은 레..
2021.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