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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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대신 화해로 끝맺은 전쟁
레러이는 포로로 잡은 명나라군 장군 몇 명을 탕롱성의 왕통에게 보내 명나라에서 오던 지원군이 모두 와해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제서야 상황을 깨달은 왕통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최후의 기습공격을 감행했지만 수많은 병사들만 잃고 말았다. 베트남군은 방벽으로 탕롱성 밖을 에워싸 왕통과 명나라군 병사들을 더욱 절망감에 빠뜨렸다. 왕통은 어찌할 바를 묻는 밀서를 베이징에 계속 보냈는데 모두 중간에서 빼앗겨 절박한 성내 사정만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레러이는 왕통에게 계속 항복을 권유하다 상황이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시점에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성 안에 들여보냈다. 왕통이 산수와 마기 장군 두 사람을 베트남군 진영에 인질로 보내 화답하면서 본격적인 강화회담이 시작됐다. 레러이와 응우옌짜이는 왕통에게 일방적인 항복을..
2021.08.03 -
마지막 전투 1) 명장 유승이 온다
왕통의 패전 보고를 받은 명의 선덕제는 기가 막혔다. 천자가 그만하자는 전쟁을 신하들이 강변해 끌고 가더니 애꿎은 수만 병사들의 목숨만 희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 와 베트남에서 손을 들고 나온다면 대제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고 주변 이민족들이 명나라를 업신여겨 다른 마음을 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명 조정은 가능한 최대 병력을 긁어모아 15만 명을 다시 베트남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군량 징발이 여의치 않아 광서성과 광동성에 별도의 관리를 파견해야 했을 정도로 명나라로서도 큰 부담을 안는 원정이었다. 새 원정군의 지휘는 안원후(安遠侯) 유승(柳升)이 맡았다. 그는 베트남 정복에 공을 세워 제후의 반열에 올랐고, 영락제의 오이라트 정벌 때 화총부대를 이끌어 대승을 견인했으며, ..
2021.07.30 -
똣동-쭉동 전투 1) 왕통의 5만 지원군
진지 총병관은 상황의 급박함을 잇따라 베이징에 보고했다. 새로 즉위한 명나라 선덕제는 거듭된 패전에 크게 낙담하면서 북쪽 몽골과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골치 아픈 베트남에서 발을 빼고 싶어 했다. 선덕제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영락제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영락제의 몽골 정벌에 여러 차례 동행했고, 그 영향으로 즉위한 뒤에도 북부전선의 안정에 큰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명의 대신들이 젊은 황제에게 조금만 더 노력하면 베트남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선덕제는 진지를 파직하고 왕통(王通) 장군을 새 총병관으로 임명해 5만 명의 지원군과 함께 베트남에 파견했다. 왕통은 정난지역(靖難之役) 때 전사한 왕진(王眞)의 아들로 일종의 혁명 유자녀였다. 정난지역이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죽고 요절한 태자의..
2021.07.26 -
대명 4차 봉기 3) 탕롱으로 가자
베트남 중부와 남부를 석권한 레러이는 그 뒤 일 년 동안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그 사이 명나라 베이징에서는 홍희제가 즉위 1년도 안 돼 죽고 아들 선덕제가 즉위했다. 선덕제는 베트남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곳 백성들에게 유화정책을 펴도록 지시했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레러이는 1426년 9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마지막 목표인 탕롱(지금의 하노이)을 향해 출정했다. 그는 만여 명의 병사들을 셋으로 나누어 진격했다. 팜반싸오와 찐카, 유명한 산적 출신인 도비 그리고 검술의 달인 리찌엔 장군이 이끄는 3천 명은 선봉대가 되어 서북 내륙을 거쳐 탕롱을 향해 갔다. 공포의 루년추와 현명한 부이부, 레쯔엉, 레보이 장군 등이 이끄는 우군(右軍) 4천 명은 홍강 하류를 장악해 응에안과 하띤에서 철..
2021.07.25 -
대명 4차 봉기 2) 승기를 잡다
명나라 조정은 베트남의 실망스러운 전황을 보고 받고 진지 총병관을 강하게 질책했다. 몇 달 내 람선의 불온세력을 섬멸하지 못하면 직책을 박탈하겠다고 경고했다. 진지는 급히 군대를 정비하고 짜롱 수복전을 준비했다. 레러이는 진지와의 결전을 앞두고 딘리엣 장군에게 병사 2천 명을 주어 남쪽의 하띤 성(省)을 공격하도록 했다. 레러이로부터 싸워 이기는 법을 배운 휘하 장군들이 이때부터 전장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딘리엣이 이끄는 람선 봉기군이 남하하자 이 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반군들이 속속 달려와 합류했다. 덕분에 람선 봉기군은 코끼리부대와 전투함대까지 갖추게 되었다. 수세에 몰린 명나라군은 하띤 성도(省都)에 틀어박혀 방어에 급급할 뿐 북쪽 응에안의 진지 총병관을 지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2021.07.24 -
대명 4차 봉기 1) 남쪽을 친다
개전을 앞두고 열린 람선의 지휘관 회의에서 응우옌칙 장군이 남쪽 응에안 성을 치자고 주장했다. 비록 명나라군 주력이 북쪽 탕롱 인근에 몰려 있지만, 람선 봉기군이 장기 투쟁에 필요한 식량과 무기를 얻으려면 응에안 같은 넓은 평야지대를 먼저 장악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응우옌칙은 응에안 성에서 저항군을 이끌다 한계에 부딪치자 부대 전체를 이끌고 레러이에 합류한 인물이었다. 레러이를 비롯한 모두가 응우옌칙 주장에 동의했다. 결과적으로 명나라는 또 한 번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람선 봉기군이 다깡의 명나라군 기지를 급습하며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1424년) 명나라군은 인근 병력을 총동원해 맞섰지만 다깡을 방어하는 데 실패했다. 이 전투로 명나라군도 람선 봉기군의 남하 의도를 눈치챘다. 진지 총병관은 람선..
2021.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