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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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된 평화
매번 어깨가 축 처진 패잔병들을 데리고 돌아왔던 람선에 레러이는 이제 개선장군처럼 귀환했다. 레러이가 명나라와 싸워 비겼다는 소식에 용기를 얻은 젊은이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레러이는 그들을 여러 곳에 나누어 비밀리에 훈련시키는 한편, 꼼꼼한 응오뚜(Ngô Từ)를 시켜 군량미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휴전 중에도 양측의 탐색과 심리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레러이는 청항서(請降書)를 써서 명에 보냈다. 청항서에서 레러이는 자신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지현(知縣)과의 불화 때문이지 명에게 반항할 뜻은 없었다면서 관대한 처분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명은 이를 받아들여 레러이에게 여러 차례 어염과 곡물 농기구를 하사하며 타잉화를 다스리는 관리로 임명하겠다고 회유했다. 레러이는 감읍한 표정을 지으면서 명 관리들을..
2021.07.21 -
대명 3차 봉기와 휴전협정
레러이는 적의 공격을 앉아서 기다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타잉화로 이동해 대공세를 준비 중이던 명나라 진지 총병관을 레러이가 선제공격했다. 진지의 대군이 추격해오자 데오옹에서 또 한 번 매복 공격으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명나라 주력군의 전력은 만만치 않았다. 잔인한 진압작전이 계속되면서 람선 봉기군은 서부 산악지대로 밀려 들어가 라오스 국경까지 퇴각해야 했다. 여기서 레러이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라오스 왕은 베트남 독립군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명과 관계가 틀어져 좋을 게 없고, 장차 베트남이 독립해 강국으로 부활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라오스 왕은 레러이를 돕겠다며 병사 2만 명과 코끼리 100여 마리를 보내왔다. 람선 봉기군은 아무런 의심 없..
2021.07.21 -
대명 2차 봉기 2) “레러이가 살아있다”
명나라군은 레러이를 처형해 봉기를 완전 진압했다고 믿고 각자의 주둔지로 철수했다. 그리고 레러이도 정적에 쌓인 람선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패배였지만 레러이는 단념하지 않았다. 진지를 보수하고 식량을 구하고 병사들을 다시 모았다. 대지주의 아들로 지역 유력 가문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이 그의 재기를 도왔다. 람선 봉기군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갔다. 명나라가 몇 번이나 람선의 저항을 멸절시킬 기회를 놓쳤던 것은 레러이의 인내심과 베트남 백성들의 싸우겠다는 의지뿐 아니라, 명 관료들의 경직된 사고에도 큰 원인이 있었다. 탕롱의 식민정부는 한정된 군사력으로 다수의 원주민을 제압하기 위해 큰 도시에 대부분의 병력을 주둔시켜 방어의 이점을 얻고 반란이 일어나면 병력을 모아 일거에 진압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 거점..
2021.07.20 -
대명 1차 봉기 2) 게릴라전의 창시자
명나라의 반응은 빨랐다. 레러이의 봉기 일주일 만에 타잉화 주둔군이 진압을 위해 몰려왔다. 람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병력과 무장과 훈련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봉기군이 패해 쫓기는 처지가 됐다. 베트남 사서는 봉기군이 락투이에서 험한 지형을 이용해 매복해 있다 추격해 온 적을 기습해 대승을 거두었다고 기록했다. 명나라군은 병력을 보강받아 재차 공격해왔다. 봉기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고, 레러이의 부인과 자식들까지 사로잡혔다. 레러이와 봉기군 지도자들은 명나라군의 진격을 막아가며 부근 치링산으로 겨우 퇴각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밀림은 나무가 모두 활엽수라는 점 말고는 겉모습이 우리나라 숲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밀림 안으로 들어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강렬한 열대의 햇볕 덕분에 바닥에 관목이 ..
2021.07.18 -
대명 1차 봉기 1) 작은 출발
독립투쟁에 가담하려는 젊은이들이 늘어나자 레러이는 람선에서 멀지 않은 룽냐이(Lũng Nhai) 산에 지휘부를 마련했다. 평야와 서부 산악지대가 만나고 남쪽으로 추 강이 흘러 유사시 기동에 유리한 곳이었다. 룽냐이 산이 지금의 어디인지에 대해 베트남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다. 가장 유력한 장소 중 하나가 람선에서 서쪽으로 약 5km 떨어진 응옥풍 마을이라는 데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레러이의 독립투쟁 기록에 나오는 대부분의 지명이 현재의 지명과 달라 전쟁의 진행 과정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거병 2년 전 레러이는 동지 18명과 함께 룽냐이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함께 살고 함께 죽으며 조국과 백성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노라” 맹세했다. 그리고 말을 잡아 피를 나누어 마시며 영원히 맹세..
2021.07.17 -
살아남은 자
레러이는 지금의 베트남 중북부 타잉화(탄호아)성 람선 지방에서 대지주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 큰 부를 이뤄 머슴만 천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유복한 집안에서 활달하게 자란 레러이는 야심 많고 호방하며 벗들을 좋아하는 풍운아로 성장했다. 그의 성격으로 볼 때 만약 평화 시기였다면 평판 나쁜 젊은이들을 끌고 다니는 부잣집 아들로 그쳤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절박한 시대의 요구가 그를 영웅의 길로 이끌었다. 쩐꾸이 황제가 침략자 명나라에 맞서 봉기하자 피 끓는 청년 레러이는 주저 없이 가담했고 이내 반란군 장군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수년간의 투쟁이 무위로 끝나고 반란이 진압 당하자 그는 조용히 고향 람선으로 돌아왔다. 반란군 수뇌부였음에도 레러이는 목숨을 보전했음은 ..
2021.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