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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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교체 5) 현명했던 광해군
명분을 앞세우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광해군은 외교에 관한 한 보기 드문 혜안을 가진 왕이었다. 그는 국제정세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정보수집에 노력했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에 시달리던 해서여진 울라 부족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1610년 조선에 관직과 교역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광해군은 울라 부족장에게 관직을 하사하면서 만주의 정세를 자세히 탐문했다. 다음 해 역관 하세국이 건주여진에 포로로 잡혀있다 돌아오자, 광해군은 그를 환영하며 정6품 사과(司果) 벼슬을 제수했다. 그의 견문과 여진어 실력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광해군은 신하들에게 건주여진에 사람들을 계속 보내 동향을 파악하라고 강조했다. 그들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야 상호 오해로 인한 충돌을 막을 수 있었다. 대여진 외교의 최종 목표는 전쟁 예방..
2021.08.23 -
명청교체 4) 운명을 건 사르후 전투
여진족이 정면공격을 가해왔으니 명나라가 이를 정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했을 때에도 가정(家丁)이라 불리는 군벌들의 사병이 왜군을 격파하면 뒤에 있던 관군이 달려들어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그런데 이 사병들마저 계속된 내란 과정에서 거의 다 소모되었다. 병사들을 급히 징집해 20만 명 가까이 모았지만 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들이었다. 명나라는 동맹국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머뭇거리는 조선을 닦달해 11,500명을 파견받았다. 여진족 내 누르하치의 경쟁 세력인 예허부도 15,000명을 보내왔다. 특히 조선의 조총수들은 명나라에 절실하게 필요했던 정예병이었다. 명나라 장수들이 서로 이들을 데려가겠다고 싸웠다.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병부시랑 양호가 정벌군..
2021.08.22 -
명청교체 3) 명나라의 첫 패배, 무순 전투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군은 1618년 4월 15일 무순성을 포위했다. 성 아래 새까맣게 모여둔 후금군을 보고 겁이 난 무순성 성주 이영방은 얼른 항복했다. 무혈 입성한 누르하치는 성안에 있던 명나라 상인 10여 명을 풀어줬다. 그는 상인들에게 여비까지 챙겨주며 고향에 돌아가 후금의 ‘칠대한’ 문서를 퍼뜨리라고 말했다. 사실 시키지 않더라도 상인들이 돌아가면 이 엄청난 난리에 대해 떠들텐데, 칠대한 문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금이 악당이라 전쟁이 난 게 아니라 명나라 조정의 박해 때문이라는 선전전의 일환이었다. 누르하치는 무순 성벽을 무너뜨린 뒤 주민들을 모두 포로로 끌고 갔다. 인구가 부족한 후금에게 땅보다는 사람이 더 귀한 자원이었다. 며칠 뒤 총병 장승음이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그러..
2021.08.21 -
명청교체 2) 후금 건국과 숨 막히는 압박
구러산 전투의 승리는 만주의 세력 판도를 바꿔놓았다. 여러 부족들이 누르하치를 새로운 강자로 인정했다. 몽골에서도 코르친 부족과 칼카 부족이 복종의 뜻을 전해왔다. 누르하치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인구가 적은 여진족이 명나라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몽골족과 제휴가 반드시 필요했다. 누르하치는 본인뿐 아니라 왕자들에게도 몽골족과 혼인을 적극 권장하여 두 민족의 융합에 노력했다. 누르하치는 해서여진 부족들을 각개격파해나갔다. 그들은 서로 사이가 나빠 단합하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그 틈을 파고들어 공격하거나 내정에 간섭하며 세력을 넓혔다. 해서여진 부족들을 놓고 예허부와 누르하치의 쟁탈전이 벌어졌다. 명나라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예허부의 편을 들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예허부 외에는 해서여진의 모든 부족들이 누르하치..
2021.08.20 -
명청교체 1) 맨손으로 시작한 누르하치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는 1559년 요동반도 소자하 강변의 작은 성 허투알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여진족 족장이었지만 일가가 세력을 잃어 주변 부족들의 눈치를 보며 사는 처지였다. 당시 여진족은 명나라의 분열정책 때문에 수십 개 부족으로 나뉘어 갈등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학대를 받았다. 일찍 결혼한 뒤에는 분가해 인삼을 캐고 장사를 하며 힘겹게 살았다. 여진족은 몽골족과 달리 순수한 유목민이 아니었다. 산에서 채취한 인삼과 동물 가죽을 명나라 조선에 팔고 식량을 들여오는 무역에 크게 의존했다. 명나라는 이 무역 허가권으로 여진족을 조종했다. 당시 명나라의 동북면 책임자는 이성량이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됐던 이여송의 아버지이다. 이성량은 수많은 전투에서 여진족..
2021.08.19 -
세계를 불태우는 ‘신의 징벌’
통일된 몽골의 최대 목표는 지난 1백 년간 자신들을 핍박해온 금나라의 타도였다. 여기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얻기 위해 몽골은 먼저 중국 서북부에 있던 서하를 공격해 2년 만에 정복했다. (1209년) 서하에 이어 금나라 북쪽 방어를 맡고 있던 거란족 기병들까지 저항 없이 몽골군에 합류했다. 금나라의 군대도 여진족 외에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돼 있었지만, 칭기즈칸의 다민족군이 공동체에 대한 충성과 결속력이 더 강했다.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토록 두려워했던 금나라 군대에 서전에서 승리를 맛본 몽골군은 병력을 몇으로 나누어 황하 이북과 만주 전역을 휩쓸었다. 몽골군은 요새화된 대도시들은 우회한 채 작은 마을들을 하나하나 공략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살해했다. 중원을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로 만든 몽골..
2021.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