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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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 속에 세워진 막왕조
신변의 위협을 느낀 소종은 이번에는 군벌에게 의지해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그는 타잉화에 근거를 둔 찡(鄭)씨 일가에게 밀사를 보내 막당중을 타도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탕롱 서쪽 썬떠이로 피신했다. 왕이 달아나고 전국에서 근왕군이 밀려오자 막당중은 소종의 동생 공황제(恭皇帝)를 즉위시킨 뒤 동쪽 자신의 세력지로 옮겨갔다. 소종의 도박이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힘의 한계를 오인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왕의 측근과 군 지휘관들 사이에 갈등이 커지자 소종은 환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찡씨 일가 수장인 찡뚜이가 보낸 장군을 처형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찡뚜이는 병사들을 데리고 와 소종 황제를 붙잡아 타잉화로 돌아갔다. 이런 분열과 하극상은 막다른 처지에 몰려있던 막당중에게 회생의 기회를 선..
2021.08.13 -
왕조의 영광은 사라지고
후레왕조는 제5대 성종(聖宗)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영화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497년 성종이 죽자 장남인 헌종(憲宗)이 제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부친 못지않은 현명한 왕이었지만, 불행히도 재위 6년 만에 44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 뒤 헌종의 셋째아들인 숙종(肅宗)과 둘째아들 위목제(威穆帝)가 차례로 즉위했는데, 숙종은 너무 어렸고 위목제는 정사보다 주색에 더 관심이 많았다. 위목제가 자신의 즉위에 반대했던 태황태후와 중신들을 살해하는 등 공포정치를 펼치자 사촌인 양익제(襄翼帝)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했다. 양익제는 전임자인 위목제의 부도덕성을 맹비난했지만, 그 역시 불필요한 토목공사에 백성들을 내몰면서도 본인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 원성을 샀다. 이들 황제들이 특별히 악하거..
2021.08.11 -
마지막 전투 3) 쓰엉지앙 전투
적의 병력을 소모시키려고 매복 작전을 펼쳤던 베트남군은 적장의 사살이라는 기대도 안했던 초대형 전과를 거두었다. 토끼를 잡으려고 펴놓은 그물에 범이 걸린 것이다. 반면에 명나라군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형국이었다. 주력부대가 허겁지겁 쫓아왔지만 이미 유승을 비롯한 다수의 장군들이 전사한 뒤였다. 혼전 중에 상당한 인명 손실을 입으며 명나라군은 부사령관 양명(梁銘) 장군의 지휘로 겨우겨우 치랑 협곡을 통과할 수 있었다. 남행길을 서두르던 명나라군은 닷새 뒤 껀쩜에 매복해있던 베트남 3만 대군의 공격을 받아 2만 명 이상이 죽거나 포로가 되는 피해를 입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전투에서 양명 부사령관마저 목숨을 잃었다. 이제 명나라 지원군의 지휘는 도독 최취(崔聚)의 손에 맡겨졌다. 최취는 영..
2021.08.01 -
똣동 쭉동 전투 2) 서전의 패배
1426년 11월 초 왕통 신임 총병관이 이끄는 지원군이 탕롱에 도착하자 명나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왕통은 즉시 베트남군에 대한 반격을 명령했다. 왕통은 탕롱 서쪽에 포진해 있는 베트남군을 소탕하기 위해 탕롱 주둔군과 지원군을 합한 10만 대군을 셋으로 나눠 진군시켰다. 먼저 북쪽에서 자신이 이끄는 우군이 꺼서까지 별 저항 없이 이동했다. 그 남쪽에 방정 장군이 이끄는 중군이 사도이에 도착해 누에 강을 건널 준비를 했다. 가장 남쪽의 좌군은 산수(山壽) 장군과 마기(馬騏) 장군이 지휘했는데 년믁 다리를 건너 탄오아이에 다다랐다. 모두 베트남 선봉대의 거점인 닌끼에우를 향하고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북부의 의병들이 합류했다고는 하지만 명나라 10만 대군에 비해 베트남 선봉대 병력이 턱없이..
2021.07.27 -
대명 4차 봉기 1) 남쪽을 친다
개전을 앞두고 열린 람선의 지휘관 회의에서 응우옌칙 장군이 남쪽 응에안 성을 치자고 주장했다. 비록 명나라군 주력이 북쪽 탕롱 인근에 몰려 있지만, 람선 봉기군이 장기 투쟁에 필요한 식량과 무기를 얻으려면 응에안 같은 넓은 평야지대를 먼저 장악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응우옌칙은 응에안 성에서 저항군을 이끌다 한계에 부딪치자 부대 전체를 이끌고 레러이에 합류한 인물이었다. 레러이를 비롯한 모두가 응우옌칙 주장에 동의했다. 결과적으로 명나라는 또 한 번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람선 봉기군이 다깡의 명나라군 기지를 급습하며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1424년) 명나라군은 인근 병력을 총동원해 맞섰지만 다깡을 방어하는 데 실패했다. 이 전투로 명나라군도 람선 봉기군의 남하 의도를 눈치챘다. 진지 총병관은 람선..
2021.07.23 -
딘(丁) 왕조, 의문의 종말
그러나 공고해만 보이던 딘 왕조는 내부의 균열로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딘보린의 장남 딘리엔은 통일전쟁에 혁혁한 공을 세운 유능한 군사 지도자로 누구나 그가 후계자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딘보린이 갑자기 막내아들 딘항랑을 태자로 책봉했다. 이때 항랑의 나이는 아무리 많아도 다섯 살이 채 안 되었다. 이제는 노인이 된 딘보린이 불손한 장남에 대한 불만과 늦동이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에 판단이 흐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장차 자신의 미래마저 걱정하게 된 딘리엔은 분노했다. 이때부터 딘 왕실에는 이해하기 힘든 비극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베트남 사서들은 979년 딘리엔이 부하들을 보내 태자 딘항랑을 암살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참사가 벌어진 뒤에도 딘보린이 장남의 반역을 처벌하거나 딘리엔이 권력..
2021.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