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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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7) 전쟁 이후
육로로 퇴각하던 몽골군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베트남군의 매복 공격에 시달리던 토곤은 병력을 소규모로 산개해 후퇴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유목민족 군대의 특기로 농경민족을 침략할 때 정규군과의 교전을 피하고 싶으면 수십 명 단위로 흩어져 지나친 뒤 순식간에 다시 집결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 전술은 소규모 부대가 마주치는 현지 주민들이 싸울 능력과 의지가 없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몽골 병사들 앞에는 결사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베트남 농민들이 있었다. 2차 대몽항전이 끝나고 몽골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호의를 침략과 학살로 되돌려 받은 베트남인들은 몽골 패잔병을 살려 보내지 말아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결국 몽골 육군 중 살아서 국경을 넘어간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토곤은 겨우 목숨을 건져 귀국했..
2021.07.02 -
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5) 운명의 하롱베이해전
토곤의 절박한 지원 요청을 받은 아버지 쿠빌라이는 번돈해전에서 무사히 돌아온 일부 수송선에다 급히 식량과 배들을 보충해 새로운 선단을 구성했다. 이번에는 오마르의 전투함대를 중국 해남성(하이난)까지 불러 장문호의 수송선단을 호위해 함께 출발하도록 했다. 조심스럽게 베트남 북부해안을 따라 내려온 몽골군의 연합함대가 바익당 강 어귀를 20여km 남겨놓은 꾸아룩 해협 입구를 지날 무렵 기다리던 베트남 수군과 맞닥뜨렸다. 이곳은 오늘날 하롱베이 관광의 중심지인 하롱시 앞바다로 수많은 섬과 바위가 산재해있어 전함들이 은신해 있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지옥을 옮겨놓은 것 같은 대전투가 벌어졌고, 베트남이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오마르 함대가 전함의 숫자나 크기 · 장비 면에서 모두 우위에 있었는데 왜 패했으며 전..
2021.06.29 -
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1) 자만이 부른 패배
1287년 11월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친 몽골군은 베트남 국경을 다시 넘었다. 쿠빌라이의 아들 토곤이 이번에도 총사령관을 맡아 몽골족 정예군 7만 명을 지휘했다. 중국 운남성과 해남성에서 징발한 현지인 2만1천 명이 협공 부대를 편성했고, 아바치가 이끄는 1천 명의 돌격대가 선봉에 섰다. 그리고 오마르의 수군이 500척의 대선단으로 육군의 진격을 지원했다. 쿠빌라이는 역전의 노장인 아릭카이야, 나시루딘과 자신의 손자인 테무르까지 베트남 공격에 합류시키는 등 원정의 성공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몽골은 베트남의 청야(淸野) 전술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군량을 모두 바닷길로 운반해 간다는 계획이었다. 이미 이전 2차 침략 때부터 몽골은 군사전술에 큰 변화를 감수했다. 본래 군수품의 현지 조달이 몽골군..
2021.06.24 -
참파를 만만히 보았다가
몽골은 먼저 베트남 남쪽의 참파부터 공격했다. 몽골은 참파에 행중서성(行中書省) 즉 중앙정부기관인 중서성의 출장소를 설치했다. 이는 남해무역을 장악하고 장차 벌어질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병력을 차출하겠다는 의도였다. 베트남을 고립시키고 남북에서 동시에 공격하겠다는 군사적 목적도 있었다. 멀쩡한 남의 나라에 지방관청을 설치했으니 참파가 두 눈을 뜨고 이를 지켜볼 수는 없었다. 인적 물적 수탈은 물론 자칫 국권까지 그대로 넘어갈 판국이었다. 하릿지 태자 등 참파의 강경파들이 몽골 관리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격분한 몽골은 즉시 원정군을 보냈다. 쿠빌라이는 송나라 정복에 공을 세우고 천주 성주로 봉해져 있던 소게투를 차출해 지휘를 맡겼다. 1282년 음력 12월, 350척의 배에 나눠 탄 만여 명의 몽골..
2021.06.18 -
싸우자는 몽골, 피하려는 베트남
송나라가 마침내 무릎을 꿇자 이제 다음 목표는 베트남이었다. 쿠빌라이 대칸이 젊은 시절 대리국을 정복하면서 화려한 군사 경력의 막을 열었기 때문에, 그때 고락을 같이 했던 운남 주둔군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 군대가 베트남에서 겪은 패배를 쿠빌라이는 자신의 치욕으로 여겨 복수하고 싶어 했다. 그런 개인적 이유가 아니더라도 몽골에게는 동남아시아로 정복지를 넓혀 갈 전진기지로서 베트남이 꼭 필요했다. 베트남을 속국으로 만든다면 열대지방의 기후와 지형에 익숙한 현지인들을 용병으로 징발할 수 있고, 바다에 서툰 몽골군의 약점을 베트남 수군으로 보완해 남중국해를 지배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는 몽골에 패할 경우 경제적 수탈에 그치지 않고 전쟁도구로 내몰려 소모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민족의 존망을 걸고 저..
2021.06.18 -
몽골의 3차 송나라 침략 (2) 경제대국의 멸망
양양 방어선이 무너지며 이제 송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에 불과했다. 쿠빌라이는 양양성을 점령한 다음해 최측근인 바얀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송의 수도를 향해 진격하도록 했다. (1274년 9월) 출정 전에 쿠빌라이는 바얀을 불러 “짐의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제 송의 땅을 점령의 대상이 아닌 통치의 영역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바얀은 쿠빌라이의 뜻에 따라 연도의 백성들에게 식량과 약까지 나누어주었고, 점령지 백성들은 약탈자에서 갑자기 보호자로 바뀐 바얀의 군대를 ‘왕자의 군대’라고 부르며 환영했다. 가사도는 송나라에 남아 있던 사실상 모든 병력인 13만 명을 긁어모아 장강 하류인 무호로 출진했다. 가사도는 어떻게든 이 병력으로 몽골군을 저지할 방도를 찾는 대신, 바얀에게 사신..
2021.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