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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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3차 송나라 침략 (1) 고립된 양양
내전을 수습한 쿠빌라이는 다시 송나라로 관심을 돌렸다. 송나라 정복은 자신이 떠맡은 역대 대칸들의 숙원사업일 뿐 아니라, 이를 완수한다면 아직도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는 몽골 내 경쟁세력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기도 했다. 그 사이 송의 수도 임안에서는 어린 황제가 즉위하고 가사도가 독재 권력을 굳히고 있었다. 가사도는 재정을 긴축하고 통화개혁과 공전법을 실시했으며 부패한 장군들을 처벌하는 등 정치인으로서는 어느 정도 재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압도적인 적에게 맞설 지도력이 없었던 것은 물론, 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경쟁자인 장군들에게 권한을 넘길 용기조차 없었다. 가사도는 다음 전쟁의 양상도 과거와 똑같을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맞춰 준비했다. 몽골 지도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송나라 ..
2021.06.17 -
몽골의 2차 송나라 침략 (2) 왕위 쟁탈전
몽케 대칸이 죽고 몽골군의 철수가 시작되자 송나라 동부전선에서 싸우던 쿠빌라이는 마음이 빠짝 타들어갔다. 자신이 중국에 그리고 동생 훌라구는 서아시아에 묶여 있는 사이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가 열리면 그곳을 통치하던 막내 아릭부케가 대칸으로 선출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철수했다가는 운남성에서 올라오던 우량하타이가 고립될 위험이 컸다. 운남 주둔군은 얼마 전까지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였고 앞으로 벌어질 내전에서 큰 힘이 되어줄 병력이었다. 쿠빌라이는 운남 주둔군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쿠빌라이는 송나라의 예상을 깨고 양쯔강을 건너 악주를 포위했고, 깜짝 놀란 송의 조정은 가사도(賈似道)에게 군사를 주어 이를 구원하도록 했다. 송의 원병 규모가 부담스러웠고 우량하타이도 어느 정도 북상해왔..
2021.06.16 -
몽골의 2차 송나라 침략 (1) 조어성의 기적
몽케 대칸은 1258년 송나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명령했다. 그는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서쪽 사천성 공략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과거 최대 격전지이었던 호북성 무창 방면은 둘째 동생인 쿠빌라이, 운남에서 올라오는 별동대는 현지 주둔군 사령관인 우량하타이가 지휘하도록 했다. 몽골의 대군이 남하하자 사천성의 대다수 성들은 겁에 질려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다. 그러나 쾌속 진격하던 몽골군은 이번에는 오늘날의 중경 북쪽에 있는 조어성(釣魚城)에서 제동이 걸렸다. 조어성은 양쯔강의 세 지류가 만나는 지점의 험준한 절벽 위에 쌓은 산성이었다. 몽골군은 성의 삼면을 포위한 뒤 동서 양쪽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조어성의 군민 10만 명이 왕견(王堅)의 지휘 아래 똘똘 뭉쳐 몽골의 공격에 대항했다. 왕견은 몽골의 1..
2021.06.15 -
운남 대리국을 정복한 몽골
칭기즈칸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다. 몽골의 전통에 따르면 막내아들이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아야 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용맹한 장수였던 막내아들 툴루이 대신 현명한 셋째아들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칭기즈칸 사후 몽골 족장들은 이를 무시하고 전통에 따라 툴루이를 새로운 칸으로 선출했다. 툴루이는 2년간 임시 칸으로 있다가 아버지의 결정을 지키기 위해 형 오고타이에게 제위를 양보했다. 오고타이에 이어 그의 장남 귀위크가 어머니의 도움으로 몽골 제국의 제3대 칸이 되었다. 그는 현명하고 결단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정적인 바투를 굴복시키기 위해 원정길에 올랐다 즉위 2년 만에 병사해 어떤 업적을 남기기에는 치세가 너무 짧았다. 귀위크가 죽자 툴루이의 막내아들 몽케가 칸의 자리에 올랐다..
2021.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