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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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교체 9) 충신을 버려 망국을 재촉하다
문맹이며 정사에 관심이 없어 목수일만 하던 명나라 천계제가 1627년 사망했다. 뱃놀이를 하다 물에 빠진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천계제는 숨지기 전 이복동생 숭정제에게 “너는 나보다 재능이 많으니 나라를 잘 다스릴 거다”라면서 제위를 물려줬다. 숭정제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 가운데 그보다 부지런했던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만약 평화 시기였다면 많은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힘으로 돌이키기에는 명나라의 국운이 너무 기울었다. 그는 즉위 초에 환관 위충현 일당을 제거해 조정의 기강을 다잡았다. 솔선수범해 국고를 아끼고, 그래도 재정이 부족하자 세금을 올리며 “내 백성들에게 1년만 폐를 끼치겠다”고 호소하는 겸허함도 갖췄다. 후금 침략에 맞서기 위해 서양의 과학 기술을 도..
2021.08.27 -
명청교체 8) 영원성을 지킨 마지막 영웅
웅정필을 죽이고 나니 국경을 지킬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이때 하급관리였던 원숭환이 단신으로 후금 진영을 염탐하고 돌아와 그들의 사정을 보고했다. 그는 문관이었으나 어렸을 때부터 군사에 관심이 많았고 각종 병법에 능통했다. 명나라 조정은 원숭환을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은화 20만 냥을 주고 산해관 밖을 지키게 했다. 그는 산해관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영원을 방어거점으로 정하고 새로 성을 쌓았다. 마침 이때 서광계가 완고한 조정을 설득해 포르투갈 홍이포(紅夷砲) 30문을 들여와 11문을 산해관에, 19문은 북경성에 설치했다. 원숭환은 산해관 홍이포 중 일부를 영원성으로 옮기고 화포 전문가를 불러 부하들을 훈련시켰다. 그런데 새로운 요동경략으로 고제라는 자가 임명됐다. 고제는 병력이 산개해 있으면 각..
2021.08.26 -
명청교체 7) 요동 요서가 무너지다
몽골에는 큰 흉년이 들었다. 수만 명의 몽골인들이 식량을 구하러 명나라 국경을 넘어왔다. 요동경략이었던 원응태는 난민들을 모두 받아들여 요양과 심양 두 성에 수용했다. 이들을 외면하면 누르하치에게 가 후금의 인구와 군대를 늘려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틀린 판단이 아니었다. 그러나 난민 가운데 후금의 밀정들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첩보전에 매우 능한 사람이었다. 1631년 3월 후금군이 심양성을 공격하다 물러갔다. 성주 가세현은 이들을 추격하다가 복병이 있는 것을 보고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사이 성안에서 밀정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문을 닫았다. 가세현은 성 밖에서 후금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심양성은 함락되었다. 닷새 후 누르하치는 후금군 전체를 동원해 요양성을 공격했다. 요..
2021.08.25 -
명청교체 6) 만주를 적신 조선인의 피
광해군은 명나라 지원군 사령관인 도원수에 강홍립을 임명했다. 그는 문관이지만 군사 부문 관직을 여럿 거쳤고 무엇보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광해군의 세차 책봉은 받아온 경력이 있어 광해군이 신뢰했다. 조선의 신하들은 명나라를 도와야 한다고 난리를 쳤지만, 막상 후금 원정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강홍립도 병을 이유로 도원수 직을 사양하고 억지로 임명된 뒤에도 사임 의사를 밝혔다. 광해군은 요양한 뒤 떠나라며 강권했다. 전국에서 차출된 병사들은 포수와 사수가 각 3,500명이고 살수가 3,000명이었다. 그런데 명나라군 유정이 포수의 숫자가 적다고 닦달해 1,500명을 증원하여 총 11,500명의 지원군이 꾸려졌다. 광해군은 강홍립이 출정하기 전 ‘관형향배 (觀形向背), 형세를 보아 행동을 결정하라)’..
2021.08.24 -
명청교체 4) 운명을 건 사르후 전투
여진족이 정면공격을 가해왔으니 명나라가 이를 정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했을 때에도 가정(家丁)이라 불리는 군벌들의 사병이 왜군을 격파하면 뒤에 있던 관군이 달려들어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그런데 이 사병들마저 계속된 내란 과정에서 거의 다 소모되었다. 병사들을 급히 징집해 20만 명 가까이 모았지만 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들이었다. 명나라는 동맹국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머뭇거리는 조선을 닦달해 11,500명을 파견받았다. 여진족 내 누르하치의 경쟁 세력인 예허부도 15,000명을 보내왔다. 특히 조선의 조총수들은 명나라에 절실하게 필요했던 정예병이었다. 명나라 장수들이 서로 이들을 데려가겠다고 싸웠다.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병부시랑 양호가 정벌군..
2021.08.22 -
명청교체 3) 명나라의 첫 패배, 무순 전투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군은 1618년 4월 15일 무순성을 포위했다. 성 아래 새까맣게 모여둔 후금군을 보고 겁이 난 무순성 성주 이영방은 얼른 항복했다. 무혈 입성한 누르하치는 성안에 있던 명나라 상인 10여 명을 풀어줬다. 그는 상인들에게 여비까지 챙겨주며 고향에 돌아가 후금의 ‘칠대한’ 문서를 퍼뜨리라고 말했다. 사실 시키지 않더라도 상인들이 돌아가면 이 엄청난 난리에 대해 떠들텐데, 칠대한 문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금이 악당이라 전쟁이 난 게 아니라 명나라 조정의 박해 때문이라는 선전전의 일환이었다. 누르하치는 무순 성벽을 무너뜨린 뒤 주민들을 모두 포로로 끌고 갔다. 인구가 부족한 후금에게 땅보다는 사람이 더 귀한 자원이었다. 며칠 뒤 총병 장승음이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그러..
2021.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