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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 1차 봉기 1) 작은 출발
독립투쟁에 가담하려는 젊은이들이 늘어나자 레러이는 람선에서 멀지 않은 룽냐이(Lũng Nhai) 산에 지휘부를 마련했다. 평야와 서부 산악지대가 만나고 남쪽으로 추 강이 흘러 유사시 기동에 유리한 곳이었다. 룽냐이 산이 지금의 어디인지에 대해 베트남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다. 가장 유력한 장소 중 하나가 람선에서 서쪽으로 약 5km 떨어진 응옥풍 마을이라는 데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레러이의 독립투쟁 기록에 나오는 대부분의 지명이 현재의 지명과 달라 전쟁의 진행 과정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거병 2년 전 레러이는 동지 18명과 함께 룽냐이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함께 살고 함께 죽으며 조국과 백성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노라” 맹세했다. 그리고 말을 잡아 피를 나누어 마시며 영원히 맹세..
2021.07.17 -
살아남은 자
레러이는 지금의 베트남 중북부 타잉화(탄호아)성 람선 지방에서 대지주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 큰 부를 이뤄 머슴만 천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유복한 집안에서 활달하게 자란 레러이는 야심 많고 호방하며 벗들을 좋아하는 풍운아로 성장했다. 그의 성격으로 볼 때 만약 평화 시기였다면 평판 나쁜 젊은이들을 끌고 다니는 부잣집 아들로 그쳤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절박한 시대의 요구가 그를 영웅의 길로 이끌었다. 쩐꾸이 황제가 침략자 명나라에 맞서 봉기하자 피 끓는 청년 레러이는 주저 없이 가담했고 이내 반란군 장군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수년간의 투쟁이 무위로 끝나고 반란이 진압 당하자 그는 조용히 고향 람선으로 돌아왔다. 반란군 수뇌부였음에도 레러이는 목숨을 보전했음은 ..
2021.07.17 -
명나라의 식민지배 2) 후쩐(後陳)왕조의 봉기
오랜 세월 자주권을 누렸던 베트남인들이 명나라의 지배에 순응할 수는 없었다. 명의 원정권 사령관이었던 장보(張輔)가 종전 몇 달 뒤 귀국하자 곧바로 반란이 일어났다. 여러 독립투쟁 세력 가운데 쩐왕조 8대 황제 예종의 아들로 알려진 쩐꾸이(陳頠)가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407년 황제를 자칭해 간정제(簡定帝)라 불리었으며 연호까지 제정했다. 이를 후쩐(後陳)왕조라고 부른다. 쩐꾸이는 그동안 명에 협조해 세력을 유지해왔던 여러 옛 쩐 왕족들의 귀부를 받아 힘을 키운 뒤 응에안 지방에서 탕롱을 향해 진격했다. 쩐꾸이의 군대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과 관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와 뒤를 따랐다고 기록돼 있다. 놀란 명 조정은 운남성에 주둔하고 있던 목성(沐晟)에게 예하 병력 4만 명을 이끌고 가 탕롱의 명나라..
2021.07.16 -
명나라의 식민지배 1) 수탈과 문화파괴
쩐왕조 복원이라는 명나라의 개전 명분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베트남인들을 위무하기 위해 3년간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주겠다고 선포했지만 호왕조의 잔여 세력이 소멸하자 이 역시 흐지부지됐다. 그리고 중국에서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관리들이 떼 지어 오면서 본격적인 수탈이 시작됐다. 애당초 명나라 군대가 좋은 일을 하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명의 식민정부는 반란을 우려해 베트남인들이 무기를 제조하거나 소지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고 저항의 수단이 제거된 베트남인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병합 1년도 안 돼 베트남에서 거둬들인 세금이 우마 24만 마리, 벼 1360만 석, 배 8670척 등이었다. 가난한 산악국가였던 중세 베트남의 경제를 거의 거덜 내다시피 한 것이다. 16세부터 60세까지 모든 남자는 군역과 부역..
2021.07.15 -
그곳에 가면) 호왕조의 수도
호뀌리는 이곳에서 수많은 피를 뿌린 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호뀌리는 임금인 순종(順宗)을 끌고 타잉화로 가 새 수도를 세우고 서도(西都)라고 이름 붙였다. 지금의 타잉화성 빈록현이다. 하노이시에서 남쪽으로 150km 그리고 타잉화시에서는 북서쪽으로 45km 떨어져 있다. 서도 주변은 옛 왕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시골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면 들판 한 가운데 웅장한 성의 유적이 나타난다. 돌로 만든 동서남북 네 개의 성문과 성벽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다. 성채는 남북으로 870m 동서로 883m의 거의 정사각형 모형이며, 정문이라 할 수 있는 남문이 높이 9.5m 폭 15m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웅장한 크기이다. 동남아시아에 현존하는 유일한 석조 성채이며, 독창적인 건축술로 ..
2021.07.15 -
명나라의 베트남 정복
국경 충돌 소식을 들은 명나라 영락제는 왕을 시해하고 나라를 빼앗은 호씨 부자를 응징하겠다며 베트남 정벌을 선언했다. 그리고 1406년 11월 명의 20만 대군이 베트남 땅에 들어섰다. 명의 원정군은 둘로 나뉘어 동군은 광서성에서 랑썬을 거쳐 서진하고 서군은 윈난성에서 출발해 홍강을 따라 남진했다. 과거 중국의 침략 경로 그대로였다. 동군은 장보(張輔) 서군은 목성(沐晟)이 지휘했는데, 명나라 장군 다수가 대몽전쟁과 내전을 거치며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장보는 당대의 명장이었다. 호뀌리 정권은 선조들이 중국 침략군을 물리친 모든 전술들을 동원해 맞섰다. 즉 적이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퇴각하는 청야전술, 소규모 부대들이 끊임없이 적 후방에 나타나 공격하는 유격전술, 보급로를 끊..
2021.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