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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 4차 봉기 1) 남쪽을 친다
개전을 앞두고 열린 람선의 지휘관 회의에서 응우옌칙 장군이 남쪽 응에안 성을 치자고 주장했다. 비록 명나라군 주력이 북쪽 탕롱 인근에 몰려 있지만, 람선 봉기군이 장기 투쟁에 필요한 식량과 무기를 얻으려면 응에안 같은 넓은 평야지대를 먼저 장악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응우옌칙은 응에안 성에서 저항군을 이끌다 한계에 부딪치자 부대 전체를 이끌고 레러이에 합류한 인물이었다. 레러이를 비롯한 모두가 응우옌칙 주장에 동의했다. 결과적으로 명나라는 또 한 번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람선 봉기군이 다깡의 명나라군 기지를 급습하며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1424년) 명나라군은 인근 병력을 총동원해 맞섰지만 다깡을 방어하는 데 실패했다. 이 전투로 명나라군도 람선 봉기군의 남하 의도를 눈치챘다. 진지 총병관은 람선..
2021.07.23 -
긴장된 평화
매번 어깨가 축 처진 패잔병들을 데리고 돌아왔던 람선에 레러이는 이제 개선장군처럼 귀환했다. 레러이가 명나라와 싸워 비겼다는 소식에 용기를 얻은 젊은이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레러이는 그들을 여러 곳에 나누어 비밀리에 훈련시키는 한편, 꼼꼼한 응오뚜(Ngô Từ)를 시켜 군량미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휴전 중에도 양측의 탐색과 심리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레러이는 청항서(請降書)를 써서 명에 보냈다. 청항서에서 레러이는 자신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지현(知縣)과의 불화 때문이지 명에게 반항할 뜻은 없었다면서 관대한 처분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명은 이를 받아들여 레러이에게 여러 차례 어염과 곡물 농기구를 하사하며 타잉화를 다스리는 관리로 임명하겠다고 회유했다. 레러이는 감읍한 표정을 지으면서 명 관리들을..
2021.07.21 -
대명 3차 봉기와 휴전협정
레러이는 적의 공격을 앉아서 기다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타잉화로 이동해 대공세를 준비 중이던 명나라 진지 총병관을 레러이가 선제공격했다. 진지의 대군이 추격해오자 데오옹에서 또 한 번 매복 공격으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명나라 주력군의 전력은 만만치 않았다. 잔인한 진압작전이 계속되면서 람선 봉기군은 서부 산악지대로 밀려 들어가 라오스 국경까지 퇴각해야 했다. 여기서 레러이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라오스 왕은 베트남 독립군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명과 관계가 틀어져 좋을 게 없고, 장차 베트남이 독립해 강국으로 부활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라오스 왕은 레러이를 돕겠다며 병사 2만 명과 코끼리 100여 마리를 보내왔다. 람선 봉기군은 아무런 의심 없..
2021.07.21 -
대명 2차 봉기 2) “레러이가 살아있다”
명나라군은 레러이를 처형해 봉기를 완전 진압했다고 믿고 각자의 주둔지로 철수했다. 그리고 레러이도 정적에 쌓인 람선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패배였지만 레러이는 단념하지 않았다. 진지를 보수하고 식량을 구하고 병사들을 다시 모았다. 대지주의 아들로 지역 유력 가문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이 그의 재기를 도왔다. 람선 봉기군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갔다. 명나라가 몇 번이나 람선의 저항을 멸절시킬 기회를 놓쳤던 것은 레러이의 인내심과 베트남 백성들의 싸우겠다는 의지뿐 아니라, 명 관료들의 경직된 사고에도 큰 원인이 있었다. 탕롱의 식민정부는 한정된 군사력으로 다수의 원주민을 제압하기 위해 큰 도시에 대부분의 병력을 주둔시켜 방어의 이점을 얻고 반란이 일어나면 병력을 모아 일거에 진압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 거점..
2021.07.20 -
대명 2차 봉기 1) 숭고한 희생
람선 봉기군은 빠르게 세력을 회복했다. 레러이는 새로 모인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성을 쌓고, 기동전에 대비해 곳곳에 식량을 숨겨두었다. 그는 위축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백성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과감한 군사 작전을 계획했다. 이번에는 람선 동쪽 명나라군 주둔지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당시 명 원정군은 탕롱 등 홍강 유역에 주로 배치됐고, 중부와 남부의 다수 지역은 귀순한 베트남 군벌들에게 수비를 맡기었다. 이른바 지방군이었는데, 명에서 온 중국인 부대에 비해서는 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레러이가 노린 약한 고리였다. 레러이는 병사들을 므엉못 산 입구에 매복시키고 명나라군을 유인하기로 했다. 소수의 람선 병사들이 명나라군 기지를 공격하다 후퇴하자, 아니나 다를까 적 병사들이..
2021.07.19 -
대명 1차 봉기 2) 게릴라전의 창시자
명나라의 반응은 빨랐다. 레러이의 봉기 일주일 만에 타잉화 주둔군이 진압을 위해 몰려왔다. 람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병력과 무장과 훈련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봉기군이 패해 쫓기는 처지가 됐다. 베트남 사서는 봉기군이 락투이에서 험한 지형을 이용해 매복해 있다 추격해 온 적을 기습해 대승을 거두었다고 기록했다. 명나라군은 병력을 보강받아 재차 공격해왔다. 봉기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고, 레러이의 부인과 자식들까지 사로잡혔다. 레러이와 봉기군 지도자들은 명나라군의 진격을 막아가며 부근 치링산으로 겨우 퇴각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밀림은 나무가 모두 활엽수라는 점 말고는 겉모습이 우리나라 숲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밀림 안으로 들어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강렬한 열대의 햇볕 덕분에 바닥에 관목이 ..
2021.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