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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만한 베트남의 패배
참파의 포 비나수르는 베트남의 혼란을 지켜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비록 승리했지만 1368년 베트남의 대반격을 경험한 포 비나수르의 공세는 위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간신히 목숨을 구한 즈엉녓레의 어머니 등 추종세력들이 참파로 달아나 쿠데타의 부당성을 호소하며 베트남 공격의 길 안내를 자청했다. 덕분에 포 비나수르는 국경지대가 아닌 베트남의 수도 탕롱을 직접 노릴 수 있게 되었다. 공격을 재개한 참파군은 1371년 배를 타고 베트남 북부에 상륙한 뒤 탕롱성을 공격했다. 잘 훈련된 참파군의 기세에 눌린 예종(藝宗)과 베트남 조정은 탕롱을 버리고 달아났다. 베트남 수도가 참파에 함락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참파군은 궁궐을 약탈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끌고 갔다. 참파군이 철수하자 예종은 ..
2021.07.09 -
무너지는 왕국
위기 상황이었다. 그런데 강한 지도력으로 이를 극복해야 할 탕롱의 궁정에서는 오히려 해괴한 정변이 일어나 가뜩이나 흔들리던 쩐왕조 체제를 거세게 뒤흔들었다. 옛날 명종 황제에게 버림받았던 장남 쩐둑은 뚜옹을 부르던 인기 여가수를 사랑해 이미 다른 남자 가수와 혼인해있던 여인을 데려다 아내로 삼았다. 이때 여가수의 몸속에는 전남편의 아기가 잉태되어 있었다. 쩐둑은 아이를 쩐녓레(陳日禮)라고 이름 짓고 친자식처럼 키웠다. 어느덧 장성한 쩐녓레는 대궐을 드나들며 출중한 인물과 언변으로 황제 유종의 생모 헌자태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유종이 34살의 나이에 후사 없이 죽자 후계 결정권을 가진 헌자태후가 주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쩐녓레를 다음 황제로 지명했다. 황제가 된 쩐녓레는 곧바로 숨겨왔던 마..
2021.07.08 -
무섭게 일어선 참파
참파는 고질적인 분열로 스스로의 발전을 가로막은 나라였다. 오늘날 베트남 중부 평야지대에 있던 참파는 비옥한 토지 덕분에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했다. 그리고 멀리 중동에서부터 중국을 잇는 해상 중계 무역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경제력으로 치면 베트남을 능가하는 참파였지만 1300년 동안 15개 왕조가 교체될 정도로 왕위 다툼이 끝없이 반복됐다. 참파를 단일 국가로 보지 않고 여러 국가의 연합체로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더구나 14세기 이슬람교가 들어오면서 전통 힌두교와 종교 갈등까지 벌어졌다. 수십 년간 유례없는 혼돈 상태가 계속됐다. 그러다 1360년 이슬람 세력이 지지하는 포 비나수르가 오랜 내전을 끝내고 모든 경쟁세력을 하나의 체제로 묶어내며 왕위에 올랐다. 베트남에서는 포 비..
2021.07.06 -
노력하는 왕으로는 부족하다
영원한 것은 없다. 철옹성 같던 쩐 왕조의 통치체제도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이완되어갔다. 오랜 평화 속에 쩐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제5대 명종(明宗) 치세 말기부터 이미 망국의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명종 자신은 백성의 질고를 근심하며 제왕의 도를 지키기 위해 일평생 노력한 왕이었다. 그는 기근이 발생하면 즉시 곳간을 열어 빈민을 구제하고 세금을 감면했다. 강이 범람하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강가에 나가 제방 보강을 지휘하기도 했다. 국경의 안정에 힘을 기울이고 외적이 쳐들어오면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맞서 싸웠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사가들은 명종에게 국가를 이끌어 나갈 장기 비전과 역량이 부족했던 것으로 박하게 평가한다. 겉으로는 번영하는 듯 보였던 왕조가 밑에서 썩어가는 것을 그는 깨닫..
2021.07.05 -
구국의 영웅이 살아남는 법
쩐꾸옥뚜언은 인종과 그 뒤를 이은 영종을 보필하다 말년에 자신의 농장이 있는 반끼엡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수십 년간 전군을 지휘했고 외적을 세 차례나 막아내 만백성의 존경을 받는 그였지만 왕에 대한 충성과 겸양을 잃지 않았다. 왕이 그에게 어떠한 호칭이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윤허했지만, 왕이 직접 정해준 ‘흥다오브엉(興道王)’ 외에 다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쩐꾸옥뚜언은 뜰에서 산책을 하다 차남에게 “진정한 권력자라면 나라를 얻어 후세에게 물려줘야 한다는데 그런 야심이 있느냐”고 물었다. 차남이 무릎을 꿇고 “송나라 태조도 미천한 농민이었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스로 나라를 세웠습니다”라고 답하자, 갑자기 칼을 빼어들고 “내 아들이 역적이었다”며 내리치려 했다. 가족들..
2021.07.04 -
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7) 전쟁 이후
육로로 퇴각하던 몽골군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베트남군의 매복 공격에 시달리던 토곤은 병력을 소규모로 산개해 후퇴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유목민족 군대의 특기로 농경민족을 침략할 때 정규군과의 교전을 피하고 싶으면 수십 명 단위로 흩어져 지나친 뒤 순식간에 다시 집결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 전술은 소규모 부대가 마주치는 현지 주민들이 싸울 능력과 의지가 없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몽골 병사들 앞에는 결사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베트남 농민들이 있었다. 2차 대몽항전이 끝나고 몽골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호의를 침략과 학살로 되돌려 받은 베트남인들은 몽골 패잔병을 살려 보내지 말아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결국 몽골 육군 중 살아서 국경을 넘어간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토곤은 겨우 목숨을 건져 귀국했..
2021.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