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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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수집에 미숙했던 황제의 치욕
명나라의 베트남 정벌 논쟁이 막 사그라들 무렵 갑자기 막당중이 사신을 보내 투항하고 토지와 호구를 기록해 명의 처분을 따르겠다고 밝혀왔다. 명으로서는 기대도 안 했던 막당중의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앞이 캄캄한 원정의 부담에서 벗어나면서도 실리도 챙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명나라 관리 모백온은 광서성으로 내려가 막당중에게 귀순하면 죄를 용서하겠다는 격문을 보냈다. 막당중은 관리들을 데리고 국경인 진남관(鎭南關)에 도착했다. 그리고 죄인처럼 머리를 풀고 목에 줄을 맨 뒤 맨발로 기어가 단상에 머리를 찧으며 항복의 표(表)를 올렸다. 막당중은 토지와 인구 대장을 바치고 국경 5개 지역을 할양하며 영원히 신복하겠다고 청하였다. 모백온은 막당중의 죄를 사면하고, 돌아가 황제의 명을 기다리도록 했다. 모백온의 상..
2021.08.15 -
복수 대신 화해로 끝맺은 전쟁
레러이는 포로로 잡은 명나라군 장군 몇 명을 탕롱성의 왕통에게 보내 명나라에서 오던 지원군이 모두 와해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제서야 상황을 깨달은 왕통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최후의 기습공격을 감행했지만 수많은 병사들만 잃고 말았다. 베트남군은 방벽으로 탕롱성 밖을 에워싸 왕통과 명나라군 병사들을 더욱 절망감에 빠뜨렸다. 왕통은 어찌할 바를 묻는 밀서를 베이징에 계속 보냈는데 모두 중간에서 빼앗겨 절박한 성내 사정만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레러이는 왕통에게 계속 항복을 권유하다 상황이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시점에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성 안에 들여보냈다. 왕통이 산수와 마기 장군 두 사람을 베트남군 진영에 인질로 보내 화답하면서 본격적인 강화회담이 시작됐다. 레러이와 응우옌짜이는 왕통에게 일방적인 항복을..
2021.08.03 -
대명 2차 봉기 1) 숭고한 희생
람선 봉기군은 빠르게 세력을 회복했다. 레러이는 새로 모인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성을 쌓고, 기동전에 대비해 곳곳에 식량을 숨겨두었다. 그는 위축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백성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과감한 군사 작전을 계획했다. 이번에는 람선 동쪽 명나라군 주둔지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당시 명 원정군은 탕롱 등 홍강 유역에 주로 배치됐고, 중부와 남부의 다수 지역은 귀순한 베트남 군벌들에게 수비를 맡기었다. 이른바 지방군이었는데, 명에서 온 중국인 부대에 비해서는 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레러이가 노린 약한 고리였다. 레러이는 병사들을 므엉못 산 입구에 매복시키고 명나라군을 유인하기로 했다. 소수의 람선 병사들이 명나라군 기지를 공격하다 후퇴하자, 아니나 다를까 적 병사들이..
2021.07.19 -
서툴렀던 응오(吳) 왕조
해방의 환희가 잦아든 뒤 찾아온 베트남의 현실은 꿈꾸어왔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응오꾸엔은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새로운 율령들을 잇달아 공포했다. 그러나 문무관직과 각종 의식, 관리들의 복제까지 중국 것을 거의 모방하다시피 했다. 정치적 예속은 극복했지만 스스로 통치체제를 정립할 역량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불완전한 국가 통합과 이로 인한 혼란이었다. 중국의 분열을 틈타 베트남 각지에서 세력을 키워온 군벌들은 어제까지 동료 장군이었던 응오꾸엔에게 존경심을 보일지언정 왕조에 충성하는 것에는 주저했다. 군벌들은 응오 왕조가 수립된 뒤에도 각자의 군사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왕권을 위협했다. 비엣족 거주지 밖의 소수민족들은 사실상 독립 상태로 중앙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못했다. 불과 ..
2021.05.21 -
영웅들 독립을 꿈꾸다
중국 최남부인 청해주의 절도사 유엄이 후양 황제에게 왕으로 책봉해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했다. 그러자 유엄은 스스로 제위에 올랐고 국호를 남한(南漢)이라 정했다. 남한은 지금의 중국 광동성과 광서성에 걸친 한반도 면적의 약 두 배쯤 되는 지역을 차지해 당시 중국을 할거했던 여러 국가들 중에는 비교적 약체였다. 그러나 베트남에는 위협적인 존재여서 쿡씨 정권은 중국 화북의 후양과 관계를 강화하며 남한의 세력 확장을 경계했다. 호시탐탐 베트남 침략을 노리던 남한의 유엄 황제는 후양 왕조가 후당으로 교체되며 중원이 혼란에 휩싸이자 이를 기회로 보고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남한군은 일거에 쿡씨 정권을 격파하고 그 수장을 압송했다. 남한의 베트남 점령은 일 년여에 그치고 말았다. 쿡씨 정권의 장군이었던 즈엉딩응에(楊廷..
2021.05.18 -
당나라 쇠퇴와 독립의 여명
베트남에게는 고통의 기간이었지만, 당나라는 중국 역사의 황금기라 불릴 정도로 번영을 구가했다. 당은 중앙아시아까지 넓힌 영토와 모든 민족문화를 받아들이는 개방성, 유럽까지 이어지는 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융성한 문학과 예술을 향유했다. 특히 6대 황제 현종은 정치세력 간 균형을 이루고, 민생안정을 꾀하며, 병역제도를 정비해 대외 원정에 성공하는 등 ‘개원의 치’라 부르는 중흥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현종이 말년에 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팽개치면서 안녹산의 난이라는 대란을 초래했다. 이후 당나라에서는 지방 절도사 세력이 황실을 옥죄고 궁정에서는 환관들이 발호해 황제를 세우거나 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문란한 정치는 토지 겸병을 불러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분노를 모..
2021.05.18